‘산업화의 역군’ 노인은 국가에 빚진 이들이 아니다 [배정원의 핫한 시대]
국가 성장 발전에 기여…‘안정된 노후’ 되도록 보호해야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90세 넘으신 부모님께서 그래도 건강하셔서 두 분이 의지하고 잘 지내셨는데, 아버지께서 요즘 인지기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아요. 서울은 요양보호사를 부르려 해도 웬만한 장애등급을 받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네요.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걱정이에요."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머니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셔서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있어요. 자식들이 모실 형편이 안 돼서요. 그런데 지내시기 좋은 곳은 대기가 너무 길고 경비가 정말 비싸요. 그렇지 못한 요양시설은 너무 열악하고 구박을 받으실까 봐 걱정이 들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은 몇 곳 없고 다 사설이더라고요."
"자녀들 독립시키고 나니, 부모님이 기다려"
최근 필자 주변에 이런 고충을 나누는 지인이 많아졌다. 통계청의 숫자를 빌리지 않아도 요즘 주변을 보면 노령층이 확실히 많아졌다. 택시를 타도 기사님의 연령이 70세 이상 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고, 아파트나 건물 경비를 서시는 분들의 연령도 많아 보인다. 지방은 서울보다 더해 버스정류장에도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많고, 논일이나 밭일을 하시는 분들 또한 대부분 그렇다. 실제로 가장 활동적인 나이의 사람이 맡아야 할 동네 이장도 60세면 동네에서 청년회에 들어가야 할 나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노령화는 이미 체감온도가 많이 높아진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올해 전체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이 18.4%를 차지하는 초고령화사회로 벌써 진입했다.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들이 65세가 되는 2025년을 넘으면 사회의 고령화 속도나 범위는 훨씬 더 빨라지고 넓어질 것이다. 예전과 달리 기대수명이 길어졌지만, 정작 그만큼 높은 삶의 질을 구가하며 만족스러운 노후를 즐기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장성한 자녀가 연로하신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산업화·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부모와 자녀가 수도권과 지방으로 독립세대로 사는 경향이 많아져 자녀의 부모 부양은 더 어려워지고 앞으로는 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부모에게 청년 자녀가 용돈이나 생활비를 지원받는 경우도 더 많아졌다.
독거노인이나, 자녀의 부양을 딱히 받지 못하는 빈곤노인들 역시 날로 증가하고 있어 노인빈곤률과 노인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한 지 오래다. 노인들의 절반가량이 빈곤함을 호소하며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실제 20대의 고용률을 60~64세 고용률이 앞질렀다는 통계자료도 나왔다. 주변 친지들은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나니, 부모님이 기다리신다'며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부모 부양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을 털어놓는다.
사실 이런 돌봄과 보호의 의무를 개인에게 돌리고 있는 국가의 빈곤한 복지정책도 답답하다.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고도의 산업화를 지향하면서 국가의 의무인 '돌봄과 보호'의 복지조차 개인이 많은 부분을 해결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래서 국가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동력이던 기성세대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를 부양하느라 자신의 노후까지 준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국이 되기까지 그들의 인생을 갈아 넣으며 봉사했던 세대는 지금 노인 빈곤의 주인공들이 돼있다. 또한 그동안 국가는 경제성장에서 발생한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지 못해 계층별 간극만 벌려 놓았다. 그래서 지금은 자산을 가진 노인과 노후 준비가 안 돼 빈곤한 노인으로 나뉘었다.
공적 연금인 국민연금이 만들어진 역사도 짧고, 임금도 낮았던 탓에 지금의 노인들은 평생을 근로자로 살았음에도 국가로부터 받는 국민연금을 못 받는 이가 절반을 넘고, 55~79세가 받는 월평균 연금수령액은 52만원을 넘지 않는다. 받아도 생활하기에 충분치 않은 소액이라 크게 도움이 안 되는데, 게다가 노인이 되면 몸은 약해지고 병으로 고통받는다. 인지기능도 약해져 산업사회 속에서 정보를 얻고 누리기에 어려움이 많아지며, 실업에 따른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은 국가가 복지정책으로 풀어야
높은 노인빈곤율은 높은 자살률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노인들의 기대수명이 최대 7년이나 차이가 나는 까닭이다. 또한 일을 더 하려 해도 노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강해 임시일용직이나, 단순노무직 같은 저임금으로 하향취업을 하게 돼 이제껏 자신이 이루었던 성취감을 다 잃어버리고 좌절하게 만들기 일쑤다.
영국 등 유럽 국가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적용한다. 물론 능력이 뛰어나면 더 많이 받기도 하는데, 연봉 협상이 비밀이므로 동료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지 못하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행히 동안인 경우 능력만 있다면 더 오래 일할 수도 있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복지정책과 평등의 가치가 높은 나라일수록 도서관에는 유유자적 책을 읽는 노인이 많고, 지자체에서 하는 문화교실 같은 곳에 노인들이 참여해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나이 들어서는 연금을 받아 생활비 걱정 없이 여생을 즐기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풍족하거나 럭셔리한 생활을 하려면 자신이 가진 개인 자산이 더 많아야 하지만 일단 국가에서 나오는 기본연금으로도 절약하면 어느 정도 안정되게 여생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고령화가 진행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국민 중 다수인 노인들의 생활과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우선은 국가가 복지정책으로 풀어야만 한다. 경제강국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국민을 위한 복지정책에 사용되는 평균 사회지출금이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복지에 무한 책임을 가지는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건강권, 안락한 환경권, 삶의 행복권 추구를 위해 복지정책을 시행할 의무가 있다.
5월31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는 현금복지와 관련해선 선별복지(사회적 최약자와 약자를 가리는)를 지향하고, 사회보장 서비스는 경쟁을 통한 시장화·산업화를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현금복지는 제한하고 서비스복지는 돈 버는 산업으로 육성하자는 것인데, 서비스복지를 경쟁시키면 당연히 국민이 치러야 할 비용이 올라간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특'자가 들어가는 메뉴가 생기면 보통의 메뉴가 허술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노인은 국가에 빚진 이들이 아니다. 평생을 열심히 일했고, 후대를 길렀으며, 국가의 성장·발전에 기여했던 이들이 나이 들어 모멸감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며 노후를 안정되고 명예롭게 보낼 수 있도록, 국가는 섬세한 복지정책으로 존중하고 돌보고 보호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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