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여성 서사'를 만나다

이재훈 기자 2023. 6. 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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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 귀한 존재가 되는 존재들"
[서울=뉴시스] 르세라핌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MV 섬네일. 2023.06.03. (사진 = 쏘스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K팝 4세대 간판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의 정규 1집 '언포기븐(UNFORGIVEN)'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K팝 내에서 다른 정경을 펼쳐내고 있다.

세련된 음악을 기반 삼은 퍼포먼스로 인기를 얻어 뒷심을 발휘하더니, 곡이 가지고 있는 서사 자체로 관심이 이동하는 '진귀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르세라핌의 이번 정규 음반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앨범엔 총 13개 트랙이 실렸다. 기존 6곡에 신곡 7곡이 더해졌다. 신곡 서사의 시작인 일곱 번째 트랙 '번 더 브리지(Burn the Bridge)'는 르세라핌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선택에 대한 확신과 터부를 깨겠다는 결심이다.

타이틀곡 여덟 번째 트랙인 '언포기븐'에서 르세라핌은 "나랑 저 너머 같이 가자 마이 언포기븐 걸스(my unforgiven girls)"라고 노래한다. 아홉 번째 트랙 '노-리턴(No-Return)'(Into the unknown)은 모험을 앞둔 설렘에 초점을 맞췄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금기를 깨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해당 곡은 하이브 의장인 방시혁 프로듀서와 프로듀서 슈프림보이, 르세라핌의 앨범에 꾸준히 참여해온 프로듀서팀 '13' 멤버들인 스코어(SCORE·이관)·메가톤(Megatone·김병석) 그리고 르세라핌 멤버 허윤진 등이 협업한 트랙이다.

세련된 저지 클럽 사운드가 호평을 듣고 있다. 최근 미국 LA 타임스가 발표한 '2023년 상반기 베스트 송 40(The 40 best songs of 2023 so far)'에 K팝 중에선 '방탄소년단'(BTS) 슈가의 '해금', '뉴진스'의 'OMG'와 함께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를 꼽았는데 이 곡에 대해 "인기 팝스타 배드 버니보다 '저지 클럽 파티'에 먼저 도착해 그를 이겼다"고 봤다. 라틴 팝 슈퍼스타 배드 버니는 지난달 중순께 저지 클럽 스타일의 신곡 '웨어 쉬 고즈(Where She Goes)'를 발매했다.

[서울=뉴시스] 르세라핌 2023.05.29 (사진=쏘스뮤직)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저지 클럽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 뉴저지 주 최대 도시인 뉴어크에서 생겨난 일렉트로닉 댄스뮤직(EDM)의 한 장르다. 디스코보다 빠른 박자와 귀에 감기는 멜로디가 특징이다. 볼티모어 클럽 댄스뮤직에서 파생됐다. 볼티모어 클럽 댄스뮤직이 좀 묵직한 반면, 저지 클럽은 좀 더 활기차고 밝으며 부드럽다.

르세라핌은 안무에서도 이런 저지 클럽의 특징을 잘 소화해낸다. 직관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유려하다. 여기에 '2023 위버스콘 페스티벌'에서 '엔딩 크레디트' 무대를 함께 꾸미며 신구 조화를 이뤄낸 엄정화를 비롯 기안84, NCT 태용, 에스파 윈터, 에이티즈 윤호·민기 등이 참여한 댄스 챌린지 영상도 숏폼 모바일 비디오 플랫폼인 틱톡(TikTok) 등에서 입소문이 나며 인기에 한몫했다. 슬로우 버전, 2배속 버전, 댄스 배틀 버전 등 다양한 버전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여기에 르세라핌과 소속사 쏘스뮤직은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관련 캠페인에도 나섰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원곡 8마디를 자신들의 가창 구간 없이 반주로만 구성한 음원으로 공개한 것이다.

르세라핌이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참여형 프로젝트로 마련했다. 인스트루멘탈 음원에 새로운 가사를 입혀 자신 만의 메시지를 담은 창작물을 만들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캠페인에 함께할 수 있다. 가수 겸 배우 비비(BIBI)가 개인 소셜 미디어에 '이브, 프시케 그리고 _' 캠페인 참여 영상을 게재하면서 막을 올렸다.

이런 요소들에 힘 입어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름 수염'은 발매된 지 두 달 가까이 돼 가는데 차트에서 역주행하는 등 상위권에서 대활약 중이다. 멜론, 지니, 플로 등 국내 음원 플랫폼 차트 상위권 유지는 물론 24일 자 '빌보드 글로벌(미국 제외)' 38위, '빌보드 글로벌 200' 71위에 오르면서 두 차트 자체 최고 순위를 갈아치웠다.

[서울=뉴시스] 르세라핌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뮤직비디오 속에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그림 '아담과 이브의 추방'(1791)이 보인다. 2023.06.25. (사진 = 쏘스뮤직 유튜브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렇게 흥행이 계속 되다 보니 음악 팬들 사이에서 다소 독특한 제목 속 곡의 서사를 들여다보는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제목에 언급된 세 여성 캐릭터는 호기심이 강해 금기를 깬 인물들이다.

성경 속 이브(하와)는 신이 금기시한 금단의 열매를 먼저 따 먹은, 즉 남성보다 철이 먼저 든 존재로 삶은 지상낙원이 아니라는 진실에 가장 빨리 눈을 뜬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뮤직비디오 속에선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그림 '아담과 이브의 추방'(1791)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 속 프시케는 새벽과 함께 사라지는 에로스의 얼굴을 궁금해한다. 결국 금기를 깨고 등불 앞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후 여러 고난을 겪지만 에로스와 사랑을 이뤄낸다. 프리스케는 그리스어로 영혼, 정신, 나비 등을 뜻한다.

푸른 수염의 아내는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잔혹 동화 '푸른 수염' 속에 등장한다. 잘 생기고 부유하며 푸른 수염을 한 귀족이 잇따라 아내를 죽인 이야기를 통해 그의 폭력성과 억압성을 그린다. 귀족은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 지하의 작은 방 문을 열지 말라고 권유하지만 그 아내는 이 금기를 어기고 작은 방문을 열어본다. 그 방에서 추악한 비밀을 발견한 아내는 결국 살아 남는다. 마거릿 애트우드, 조이스 캐럴 오츠, 하성란 등 국내외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주체성을 살려 이 작품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르세라핌. 2023.05.02. (사진 = 쏘스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르세라핌은 세 인물들을 다룬 해당 곡에서 "괜찮단다 뭐를 해도 거짓말인 걸 난 알아 / 괜찮겠지 뭘 해도 착한 얼굴에 네 말 잘 들을 땐 / 괜찮지 않아 그런 건 내 룰은 나만 정할래 / 싫어 싫어 난 인형이 아냐 / 찡그린대도 그것도 나야 / 보지 말라 보고 파 날 둘러싼 이 금기들 / 그날의 이브처럼"이라고 노래한다.

30대 K팝 팬 조모(33·여)씨는 "여성 아이돌의 특성 상 수동적인 대상으로 주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너한테 보여주려고 입는 게 아니라 '나는 내 마음 대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는 걸그룹 노래는 흔치 않지 않다"라면서 "르세라핌의 노랫말은 요즘 걸그룹을 소비하는 젊은 연령대와도 맞물려서 더 호응을 얻고 있다"고 봤다.

K팝 칼럼니스트 리얼하 씨는 "곡 속 상대방을 누구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자친구든 부모님이든 혹은 사회든 '주체적인 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면서 "여성이 아니어도 상관 없긴 하지만, '인형' 가사가 주체적인 여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르세라핌이 계속 건강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점도 그렇고, 안무도 굉장히 걸크러시적"이라고 평했다.

이처럼 그간 꾸준히 금기를 노래해온 르세라핌의 행보와 곡이 모티브로 삼은 인물들이 가진 함의가 맞물리며 K팝이 흔히 해석된 것과 다른 한층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해석법이 적용된다. 그건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이 발표한 올해의 컬러인 비바 마젠타(Viva Magenta)과도 연결된다. 르세라핌은 이번 활동에 해당 색을 내세웠다. 비바 마젠타는 대담하면서 포용력이 느껴지는 붉은 계열 색상이다. 희귀한 천연염료인 연지벌레에서 영감을 받았다. 연지벌레는 특유의 빨간빛 때문에 자연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 귀한 존재가 됐다.

페로의 '푸른 수염'에서 자신이 이끄는 연극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이름을 따온 젊은 여성 연출가 겸 극작가 안정민은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에서 '부정성의 긍정성'을 읽었다고 했다. 귀족이 절대 열어보지 말라 했지만 끝내 방문을 연 아내처럼, 열어보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을 무언가를 세상에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극단 이름을 지은 그녀다.

[서울=뉴시스] 르세라핌. 2023.05.01. (사진 = 쏘스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안 연출은 "다 안되고 내가 희생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일단 해보는 거다. 내가 부서질 줄 알면서도 일단 금기를 깨 보는 거다. 안 된다고 하는 일들을 안될 걸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거다. 그래서 문을 열면 안 된다고 할 때 문을 한번 열어보는거, 사과 먹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한번 사과 먹어보는 것"이라고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를 해석했다.

"뮤직비디오 끝부분에서 푸른수염의 방을 찾아 헤매는 아내를 그리는 게 아니라, 한 남자가 방을 찾아 헤매다 방문을 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브·프시케·푸른수염이 다 함께 있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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