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 미술로 불렸던 실험 미술, 미술관의 주인공 되다

김민 기자 2023. 6. 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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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배우가 윤동주 김소월 나태주 모음 시집 '시로 배우는 예쁜 말'을 읽어 내려간다.

2015년 작가가 중국 산시성 미술관의 초청받아 선보였던 이 퍼포먼스는 흰색과 검은색, 시가 가득했다 사라지는 시집, 비었다가 차오르는 종이 등 반대되는 개념을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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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연계의 일환으로 김구림 작가가 기획한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배우 서진 씨가 시를 낭독하고, 찢긴 시집을 작가 오재우 씨가 건네받아 종이 위에 다시 쓴다. 2023.6.14/뉴스1

흰옷을 입은 배우가 윤동주 김소월 나태주 모음 시집 ‘시로 배우는 예쁜 말’을 읽어 내려간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를 모은 책은 시 하나를 읽을 때마다 한 장씩 찢겨나가고, 찢어진 종이는 검은 양복을 입은 작가가 건네받아 흰 종이 위에 다시 글씨로 쓴다. 시집 한 권이 끝나갈 즈음이면 예쁜 말들은 찢어지고 구겨져서 사라지고, 텅 빈 종이는 새카맣게 차오른다.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에서 배우 서진 씨와 작가 오재우가 찢어진 시집을 주고받는 모습. 2023.6.14/뉴스1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로비에서 14일 김구림 작가(87)의 퍼포먼스 작품 ‘생성에서 소멸로’가 재현됐다. 2015년 작가가 중국 산시성 미술관의 초청받아 선보였던 이 퍼포먼스는 흰색과 검은색, 시가 가득했다 사라지는 시집, 비었다가 차오르는 종이 등 반대되는 개념을 교차한다. 그러면서 정해진 개념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 퇴폐 미술로 여겨졌던 젊은 저항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한강변의 타살〉, 1968,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 퍼포먼스의 기록. 사진 황양자 제공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등 1960, 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주요 작가 29명의 작품 약 95점, 자료 3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미국 구겐하임미술관과 공동 기획된 전시는 청년작가연립전, 제4집단, 아방가르드협회, ST 학회, 대구현대미술제 등 과거의 주요 전시와 작품을 아우른다.

전시장 초입에서 볼 수 있는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투명풍선과 누드’(1968년), 정강자의 ‘키스미’(1967년)는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했던 젊은 예술가들의 패기를 담고 있다. ‘투명풍선과 누드’는 1968년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존 케이지의 음악을 배경으로 이뤄진 퍼포먼스다. 정찬승, 강국진이 정강자의 상의를 찢으면, 관객들이 그녀의 상반신에 투명 풍선을 붙이고 다시 터뜨리는 순서였다.

같은 해 예술가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 비리가 터지자, 세 작가는 다시 제2한강교(양화대교) 아래에 모여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를 묻었다. 퍼포먼스 작품 ‘한강변의 타살’이다.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기피자(문화 관념론자) 등이 젊은 작가를 죽이고 있다는 항변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실험 미술은 초기 ‘퇴폐 미술’로 타블로이드 신문에 보도되고, 작가가 체포되거나 작품이 철거되곤 했다. 그리고 약 반세기가 지나 미술관의 주인공이 됐다.

● 구겐하임, 해머미술관 순회

김구림, 〈1_24초의 의미〉, 1969, 16mm 필름, 컬러, 무음, 9분 14초, ed. 2_8,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소장 © 김구림, 사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제공

전시는 총 6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첫 주제 ‘청년의 선언과 시대 전환’이 1960년대 후반 젊은 작가들의 실험미술 양상을 소개했다면, 그다음은 김구림과 제4집단을 소개한 ‘도심 속, 1/24초의 의미’, ‘전위의 깃발 아래 -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거꾸로” 전통’, ‘‘나’와 논리의 세계’, ‘청년과 지구,촌 비엔날레’ 등으로 이어진다.

성능경, 〈여기〉, 1975, 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 10.2×15.2cm(18), 작가소장 © 성능경, 사진 작가 제공

김구림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 ‘현상에서 흔적으로’(1969), 하종현의 ‘작품 73-13’(1973), 이승택의 ‘무제’(1963/2018), 이건용의 ‘신체항’(2023), 성능경의 ‘신문 1974.6.1. 이후’, 이강소의 ‘무제 75031’(1975) 등을 볼 수 있다. 성능경의 ‘신문 읽기’ 퍼포먼스도 21일 미술관 로비에서 열렸다. 28일 오후 2시에는 서울관 전시실6 앞에서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또 이 전시는 9월 1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내년 2월 11일에는 미국 LA 해머미술관으로 순회한다.

뉴스1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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