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시체들이 썩는 냄새, 70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한다"

신관호 기자 2023. 6. 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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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전쟁. 몇 년간 잠을 제대로 못자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당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싸움만 했던 것 같네요. 시체 쌓인 곳을 지나기도 했는데, 참혹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게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일입니다."

6·25전쟁 당시 많은 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 이기백 옹(94)은 최근 강원 원주보훈요양원에서 <뉴스1> 과 만나 70년 전 참혹했던 전쟁 상황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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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주보훈요양원서 만난 6·25전쟁 참전용사 이기백 옹
"올해 94세, 아직도 기억하는 참혹한 전투…아픔의 역사 반복돼선 안돼"
6·25전쟁 당시 많은 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 이기백 옹(94)이 최근 강원 원주보훈요양원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주보훈요양원 제공) 2023.6.25/뉴스1 신관호 기자

(원주=뉴스1) 신관호 기자 = “1950년 6월 25일 전쟁. 몇 년간 잠을 제대로 못자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당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싸움만 했던 것 같네요. 시체 쌓인 곳을 지나기도 했는데, 참혹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게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일입니다.”

6·25전쟁 당시 많은 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 이기백 옹(94)은 최근 강원 원주보훈요양원에서 <뉴스1>과 만나 70년 전 참혹했던 전쟁 상황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그는 현재 복권기금 등으로 국가유공자의 복지를 지원하는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의 원주보훈요양원에서 생활 중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무공수훈자(화랑 무공훈장)의 자격으로 보훈요양원에 입소해 노후를 보내고 있다.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요양원 직원들과 늘 미소로 담소를 나눈다고 한다.

하지만 이기백 옹의 70여 년 전 이야기에선 미소보다는 그의 그늘 진 눈빛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소소한 사연은 시간이 지나면 잊겠지만, 직접 겪은 참혹했던 6·25전쟁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기백 옹은 ‘6·25’ 라는 숫자에 대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면서도, 국가와 국민이 잊어선 안 될 숫자라고 표현한다. 전쟁의 아픔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기백 옹은 “가족과 헤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참혹한 상황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또 6월 25일이 다가왔는데, 과거의 아픔을 알고, 앞으로는 그런 슬픔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기백 옹과의 일문일답.

-2023년은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진 후 73년째가 되는 해다. 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지 70년이 되는 해다. 전쟁이 멈춘 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번에도 6월 25일은 다가왔다. 그에 대한 소회는.

▶1930년 6월 18일생이다. 올해로 94세인데,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 당시 상황은 아직 생생하다. 그만큼 참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기억할 수밖에 없다. 당시 전쟁 중 쌓인 시체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가 있었다. 시체가 썩는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잊고 싶은 아픔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아닌가. 70년이 지났어도, 그 역사가 반복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말을 하고 싶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참전했다. 흔히 혈기왕성한 나이라고 한다. 같은 연령대에 넘치는 용기로 분전한 군인도 많았지만, 생사를 두고 두려움이 적지 않았을 전우도 많았을 것 같다. 수많은 전투를 어떤 마음으로 이겨냈나.

▶전쟁이 벌어진 뒤 얼마 지난지 않아 7월쯤 됐을 때다. 그때부터 화기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지금이야 훈련도 많이 받고, 전쟁을 대비할 여러 준비가 있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겁이 왜 없었겠나.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어린 나이에 총과 수류탄을 챙겨 다녔다. 전쟁 중 이동하면서 마을 주민만 봐도 혹시 적이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도 있었다. 인민군들에게 포위를 당한 적도 있었고, 간신히 UN군을 만나 생존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겨야, 전쟁이 끝나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6·25전쟁 당시 많은 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 이기백 옹(94)이 최근 강원 원주보훈요양원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주보훈요양원 제공) 2023.6.25/뉴스1 신관호 기자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 중 하나를 ‘낙동강 방어선 사수’라고 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상황이었고, 그 방어선 사수를 위해 다부동 전투에도 참전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

▶인민군에게 밀리면서도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격전지였다. 그렇다보니 당시 전투는 총력전으로 다할 수밖에 없었고, 처참했다. 전우들이 잇따라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내가 살 수 있을지, 죽어서야 돌아갈 수 있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투가 벌어졌고, 전사자 소식을 수없이 듣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던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저지선이자, 인천상륙작전 개시 등의 전세를 뒤집기 위한 곳이었다.

-다부동 전투 후에도 국군은 여러 고비가 있었다. 가장 걱정이 컸던 상황은 무엇이었나.

▶중공군의 공세 때문에 벌어진 1·4 후퇴였다. 평양을 넘어 북진을 한 국군이었는데,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밀리며, 전장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인민군과의 전투도 고난이었는데, 중공군의 공세가 고충을 더 키웠다. 그들은 밤마다 소리를 내는 전술도 취했고, 인해전술로 국군을 힘들게 했다. 전쟁 중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비롯해 대부분의 지방을 다니며 싸웠지만 중공군의 개입 후 치러진 전투들은 지겨운 전쟁을 더 어렵게 했다.

-개전 초부터 정전이 이뤄질 때까지 4년여 간 전투를 벌였다. 그 가운데 부상도 입었는데, 어떻게 치료했나.

▶오른발에 아직도 흉터가 있다. 파편으로 인해 다친 것이다. 치료를 제 때 못했다. 긴박한 전투 중이었기 때문이다. 총이 목발 역할을 했다. 다치고 간신히 후퇴했던 기억이 있다. 후퇴 후 완벽한 치료도 못했다. 전쟁이 멈추고 나서야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상처가 오래 방치돼 큰 수술을 해야 했다. 왼쪽 눈 주변도 상처를 입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실명의 위기를 피했다.

-다시 돌아온 6월 25일이다.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육군 제1사단-12연대-2대대-8중대 일등중사. 전쟁 당시 군에 있을 때 내 마지막 소속과 계급이었다. 수많은 전투와 전사자 발생 등으로 많은 편제가 이뤄져 기억 못할 수도 있었지만, 나이 90이 넘은 지금도 기억한다. 참혹한 전쟁 발생.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지 못한다. 슬픈 상황이 또 일어나지 않으려면 안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참전 유공자들은 참혹한 전쟁 기억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자랑스러움이 있다. 특히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자랑스러운데, 힘들게 지켜온 나라에서 후손들이 아픔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번영하길 바란다.

6·25전쟁 당시 많은 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 이기백 옹(94)이 최근 강원 원주보훈요양원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주보훈요양원 제공) 2023.6.25/뉴스1 신관호 기자

skh88120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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