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범인이라면"…갈래길서 피의자 따라간 경찰관의 '촉'

김도균 기자 2023. 6. 2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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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서울 서초경찰서 서초2파출소 소속 노주련 경장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13만건(2021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서울 서초경찰서 서초2파출소 노주련 경장(33·왼쪽에서 다섯번째)과 동료들의 모습./사진=노주련 경장 제공

"마스크 쓰고 검정 가방을 멘 남성이 ATM(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엄청 뽑고 있어요."

지난달 13일 오전 9시25분쯤 서울 서초경찰서 서초2파출소 소속 노주련 경장(33)에게 접수된 신고다. 수상한 사람이 여러개의 카드로 현금을 뽑고 있다고 했다. 범죄 조직 인출책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노 경장은 곧바로 신고장소인 강남역 인근 A은행의 한 지점으로 향했다. 노 경장이 은행에 도착했을 때 용의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사람이 양재역 방향으로 갔다"는 신고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노 경장은 용의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남 한복판에서 방향과 인상착의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용의자의 다음 행선지를 알아야 했다.

그때 노 경장은 "내가 범인이라면 어디로 갈까"라고 생각했다. 범인이라면 한 은행에서만 돈을 뽑기보다 여러 은행에서 나눠서 뽑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음 행선지는 분명 다른 은행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초구에서만 4년째 근무중인 노 경장은 인근 지리를 꿰고 있었다. 노 경장이 머릿속으로 그린 지도에는 용의자가 향한 경로로 멀지 않은 곳에 B은행 지점이 있었다. 노 경장은 즉시 B은행으로 향했다.

노 경장의 추측대로 같은 인상착의를 한 용의자가 B은행에서 또 현금을 인출하고 있었다. 노 경장은 용의자 C씨(50대·남)에게 인출 중인 카드를 보여달라고 말했다. 확인한 카드는 C씨 명의가 아니었다. C씨가 들고 있는 검은 가방에서는 5만원짜리 수백장이 발견됐다. 몇 차례 추궁하자 C씨는 "현금을 인출해 약속된 장소에 갖다 놓으면 금액당 수수료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노 경장은 신고가 접수된 지 약 20여분 만인 오전 9시50분쯤 C씨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현행범 체포했다. 타인 명의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면 불법이다. 경찰은 C씨가 어떤 범죄 조직에 가담했는지 윗선에 대한 수사를 진행중이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사진=임종철
형사 못지 않은 '지역경찰'…"보이스피싱 잡는 진짜 형사 되고파"
공군 부사관 출신인 노 경장은 2016년 순경 공채에 합격해 2017년 8월 경찰에 입직했다. '왜 경찰이 됐느냐'는 질문에 노 경장은 "뉴스에서 경찰이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을 보면 뭔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고 답했다.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지역경찰'이지만 노 경장은 현행범을 목격했을 때는 마치 '형사'처럼 돌변한다. 이달 초에도 노 경장은 음주 상태로 전동 킥보드를 몰던 20대 남성을 현행범 체포했다.

당시 노 경장은 "얼굴이 벌건 사람이 전동킥보드를 운전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곧바로 순찰차를 몰고 나갔으나 삼거리에 다다랐다. 두 갈래길 중 어느 경로일지 선택해야 했다.

노 경장은 그때도 용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노 경장이 마주한 삼거리는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좌회전을 하려면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술에 취한 사람이라면 신호를 기다리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을 거라 판단했다. 노 경장은 순찰차의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고 속력을 높였다.

300m쯤 달리자 킥보드를 탄 남성 두 명이 발견됐다. 노 경장은 정지하라는 안내 방송을 했으나 용의자는 전동킥보드를 세우지 않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왕복 8차선 대로에서 검거는 위험하다고 판단해 골목으로 유도했다.

노 경장의 유도대로 전동킥보드를 탄 일행은 골목으로 진입했다. 노 경장은 용의자 일당보다 빠르게 골목을 우회해 달려 도주로를 막았다. 전동킥보드의 속력이 느려졌을 때쯤 순찰차 조수석에 있던 노 경장의 동료가 몸을 날려 이들을 검거했다.

조사 결과 20대 남성 운전자에게서는 면허 정지 수준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나왔다. 이에 더해 이 남성은 무면허로 전동킥보드를 운행하고 있어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무면허운전)으로 입건했다.

노 경장은 본격적으로 수사 부서에서 경력을 쌓고 싶다고 말한다. 노 경장은 특히 보이스피싱 범죄를 수사하는 부서를 희망하고 있다. 노 경장은 "지구대·파출소에서 본 범죄 중에 보이스피싱이야말로 가장 악랄한 범죄 같다"며 "가난한 피해자들에게 빚을 내게 해 그 돈을 가져가는 정말 추악한 범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을 검거하는 경험을 쌓은 뒤에 그런 범죄를 뿌리뽑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고 싶은 꿈이 있다"고 밝혔다.

김도균 기자 dk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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