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99세 배수용 옹 "전우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면"

정재익 기자 2023. 6.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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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3주년을 맞은 25일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배수용(99) 옹은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한 전우들이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며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전했다.

"1950년 8월25일 입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전쟁 상황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몰려와 대구 지역을 방어할 병력이 시급했다. 나는 27살의 나이로 생계를 위해 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육군본부 이명흠 대위는 유격대원을 모병하고 있었고 지역의 18~19세 사이 젊은 학생들이 자진 지원했다. 이를 보고 내 한 몸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후방에서 몸을 사릴 수 없다는 생각에 입대를 결심했다. 이렇게 장사상륙작전을 위한 772명의 독립유격대 제1대대 병력이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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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뉴시스] 정재익 기자 =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배수용 옹이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3.06.25. jjikk@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정재익 기자 = "전우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모습 보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6·25전쟁 73주년을 맞은 25일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배수용(99) 옹은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한 전우들이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며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전했다.

이어 "작전에 투입된 독립유격대 제1대대의 희생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배수용 옹은 6·25전쟁 장사상륙작전 참전 무공수훈 상이국가유공자다. 1950년 8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육본직할독립 제1유격대대, 육군 제2사단 32연대 등에서 복무했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에서 15일까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기 위해 북한군의 주의 분산과 보급로 차단을 목적으로 시행됐다. 오랜 기간 군 기밀로 유지되다가 1997년 장사리 해변에서 작전 중 사용됐던 문산호와 유해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은 배 옹과의 일문일답.

- 입대는 어떻게 하게 됐는지.

"1950년 8월25일 입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전쟁 상황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몰려와 대구 지역을 방어할 병력이 시급했다. 나는 27살의 나이로 생계를 위해 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육군본부 이명흠 대위는 유격대원을 모병하고 있었고 지역의 18~19세 사이 젊은 학생들이 자진 지원했다. 이를 보고 내 한 몸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후방에서 몸을 사릴 수 없다는 생각에 입대를 결심했다. 이렇게 장사상륙작전을 위한 772명의 독립유격대 제1대대 병력이 구성됐다."

- 장사상륙작전 당시를 재현한다면.

"9월13일 출정에 앞서 병력은 유품을 남기기 위해 머리카락, 손톱, 발톱 일부를 잘랐다. 이후 3일치 식량인 미숫가루와 각종 장비를 몸에 두른 채 부산 4부두에서 문산호에 올라탔다. 출동 전에는 왠지 모르게 행사장에 참가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5시 장사리 해안에 도착할 무렵 강하게 불던 태풍에 배가 쾅 소리를 내며 좌초됐다. 병력은 바다로 뛰어들어 상륙지점까지 전진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장사리 해안을 이미 점령한 북한군은 앞산과 능선 등 3면에서 총탄 세례를 퍼부었고 짙은 안개 탓에 정면에는 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군은 몸을 숨기기 위해 모래톱을 손가락으로 파 참호로 만들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 전우가 옆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다리 부분에 통증도 있었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이 좌우 방향만 보고 응사했다. 그러던 중 UN군 등 아군의 지원사격이 시작됐다. 적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아군은 북한군 200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약 10시간이 걸린 사투였다. 상륙 이후 양쪽 넓적다리 부분에 적의 박격포탄 파편이 박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옷과 몸이 바닷물에 소독돼 응급조치 없이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73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상흔이 남아있다."

[대구=뉴시스] 장사상륙전승기념공원. (사진=대구지방보훈청 제공) 2023.06.2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 전쟁 이후 삶은 어떻게 보냈는지.

"장사상륙작전으로 숨진 전우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활동을 했다. 전역 후 목재회사에서 상임전무를 맡아 근무하던 중 장사상륙작전참전 유격동지회를 발족했다. 첫 활동으로 최재명, 강정관 동지 등과 위령탑을 건립하기 위해 영덕군과 국방부를 찾아 다녔다. 당시 정부의 위령탑 건립 기준은 전사자가 200명 이상일 때 가능했다. 우리는 공식 전사자가 139명으로 불가능했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1991년 9월 위령탑 준공식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준공식을 보니 눈물이 복받쳐 가슴 답답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다. 꽃다운 젊음을 피우기 전에 호국의 영혼이 된 전우가 왜 그리 원통한지 세상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또 같은해 장사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모래톱에 새겨진 충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우수작품으로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맥아더장군이 이명흠 대위에게 보낸 친서를 새긴 비석도 위령탑 근처에 건립됐다. '

장사상륙전승기념공원 준공식도 했다. 이곳은 전후 세대의 안보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무공수훈자회 경산시 지회장, 경북도지부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 경산시 남부동 분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 하고 싶은 말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국민들이 장사상륙작전에 대해 더 많이 알아주셨으면 한다. 이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학도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작전에 투입돼 희생양이 됐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인천상륙작전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독립유격대 제1대대의 이러한 희생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살아있는 동안 전장에서 희생된 무명용사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모두 안장되는 모습을 보고 가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작전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아직 발견되지 못한 유해가 많다. 발족 당시 50여명이었던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 전우는 대부분 돌아가시고 나를 포함 5명밖에 남지 않았다. 땅에 묻힌 전우에게 한마디라도 더 하고 가면 후련할 것 같다."

☞공감언론 뉴시스 jjik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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