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공포 물리친 그 열매 없었다면...대항해의 수호신은 이것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역사를 바꾼 사물들2] 대항해 시대, 미지의 바다를 향해 출항했던 탐험가들과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도, 언제 닥칠지도 모를 폭풍우도, 어디서 출몰할지 모를 해적도, 낯선 곳에 도사리고 있을 원주민들도 아니었다.
원인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질병이었다. 손발이 붓고, 잇몸이 부어올라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온몸에 미칠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고 그러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었다. 동료 선원들이 한명 한명 죽어나갈 때, 다음 차례가 나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무기력해졌다. 훗날 ’괴혈병‘으로 알려진 바로 그 질병이었다.
1497년 7월 8일 4척의 배에 168명의 선원을 태운 바스코 다가마 함대는 포르투갈 리스본항을 출발한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잡은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동행했다. 덕분에 바스코 다가마의 선단은 비교적 순조롭게 아프리카의 최남단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항해가 5개월 이상 이어지자 선원들 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가마 함대의 항해일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수많은 선원이 배안에서 병에 걸려 손발이 붓고 잇몸이 부어올라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대항해 시대 이전의 항해라고 해봐야 근해를 오고가는 한달 남짓한 항해가 전부였던지라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질병이었다. 당연히 다가마도 그러한 질병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름도, 원인도 알지 못했다. 선실 안의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선원들을 갑판 위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게 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항해 6개월만에 다가마 함대는 모잠비크에 정박했고, 강가에 노란색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선원들은 오렌지를 따서 배불리 먹었다. 그 덕에 많은 선원들의 손발과 잇몸의 붓기가 빠졌고 건강을 회복했다.
다가마 함대는 인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무서운 질병을 경험했다. 항해일지에는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기록했다.
바람이 조금도 불지 않거나 사납게 휘몰아치는 날이 빈번한 탓에 우리는 대략 석 달이 걸려서야 만(gulf)을 건넜고, 그 사이 선원이 다시 부어오른 잇몸으로 고통받으며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다리를 비롯한 신체 곳곳이 부었고 붓기가 온몸으로 퍼져 환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른 질병의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인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선원 가운데 30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배를 운항할 수 있는 사람은 함선마다 7~8명 밖에 남지 않았으며 남은 선원은 운항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이 상황이 2주만 더 지속되었다면 배를 운항할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으리라 장담한다. 우리는 규율이 송두리째 사라질 정도로 심각한 고비를 맞이했다.
1592~1593년 남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호킨스 경이 경험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호킨스 경이 남아메리카 탐험에 나섰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가 하는 일은 해적질이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시대로 영국 정부는 해적질을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장려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무적함대와 전쟁에도 해적을 적극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 활약한 유명한 해적 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는 기사 작위까지 내릴 정도였다. 네덜란드가 청어 산업을 통해 대항해시대를 맞을 준비를 했다면 영국은 해적 활동을 통해 대항해시대를 준비한 셈이다.
아무튼 호킨스 경이 이끄는 탐험대를 가장한 해적함대는 1593년 6월 세 척의 배에 선원 2000명을 태우고 출항했다. 하지만 역풍을 만나는 바람에 10월이 되어도 브라질 해안에 상륙할 수가 없었다. 선원 중에 괴혈병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했던지 건강한 선원이 24명뿐일 정도였다.
호킨스 경은 오렌지의 효능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는 “나는 이 질병에 대응하면서 시큼한 오렌지와 레몬을 보급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항해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해안가에 상륙했고 그때마다 오렌지와 레몬을 사모았다. 브라질에서 오렌지와 레몬을 200~300개 구입했을 때 이런 일지를 남겼다.
선원들은 배를 타고 오면서 크게 기뻐했다. 많은 이들이 오렌지와 레몬을 보고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오렌지와 레몬에는 신의 능력과 지혜가 비밀스럽게 담겼다. 신이 미지의 효능을 숨겨둔 덕분에 두 과일은 그 질병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되었다. 최근 나는 괴질병에 걸린 선원들에게 오렌지와 레몬을 나눠 먹도록 지시했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서 한 사람 몫이 서너개를 넘지 않았다.
1746년 그는 350명의 해군이 승선한 솔즈베리호에 배치됐다. 솔즈베리호에도 괴혈병 환자가 발생했다. 린든은 괴혈병에 걸린 12명의 해군들을 대상으로 분리 실험을 진행했다. 12명을 2명씩 6그룹으로 나누어서 식사 후 각각 다른 것을 먹게 한 것이다. 1그룹은 사과주, 2그룹은 황산 2방울, 3그룹은 식초 2스푼, 4그룹은 바닷물 300밀리리터, 5그룹은 오렌지 두 개와 레몬 한 개, 6그룹은 마늘, 겨자씨 등을 제공했다. 실험 후 린든은 이렇게 보고했다.
눈에 띄는 신속한 효과는 오렌지와 레몬을 섭취한 그룹에서 나타났다. 이 그룹에 속하는 선원 한 명은 6일 뒤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중략)···이 선원은 플리머스에 도착한 6월 16일이 되기도 전에 상당히 건강해졌다. 같은 그룹에 속한 다른 선원도 훌륭히 건강을 회복했다. 현재 그는 몸 상태가 무척 좋다고 판단되어 나머지 환자를 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임스 린든의 역사적인 논문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은 괴혈병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1795년 해군 본부의 선원부상자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블레인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서 선원에게 매일 레몬즙 20밀리리터를 제공하도록 했다.
블레인의 공로로 영국 해군에서는 괴혈병이 거의 사라졌지만 상선에서는 괴혈병이 자주 보고됐다. 1854년 영국 의회는 상선 선원에게도 레몬이나 라임을 보급하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1867년에는 상선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선원에게 공급할 라임의 양과 품질까지 규정했고 유반시 처벌 조항까지 마련했다.
1860년까지 영국 해군은 주로 몰타,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레몬을 조달했다. 1850~60년사이 영국 해군이 한해 평균 수입한 레몬즙의 양이 160만 갤런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영국 해군이 레몬을 싹쓸이하자 레몬 가격이 폭등했다. 이탈리아 레몬의 70% 이상이 시칠리아 섬에서 생산됐는데 영국 해군 수요로 인한 레몬 특수가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하는 마피아를 태동시키도 했다.
가격이 급등한데다 지중해 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 해군은 카리브해 지역에서 나오는 라임으로 대체했다.
이뿐 아니었다. 영국은 안정적인 라임 공급을 위해서 영국의 식민지 곳곳에 라임 나무를 심었다. 호주, 뉴질랜드, 서인도제도, 말레이시아 등 식민지마다 라임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고 이를 통해 라임의 안정적인 공급망을 완성했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라임 나무를 심고 라임즙을 즐겨 마시자 영국 식민지에서는 영국인들, 특히 영국 해군을 ’라이미(Limey)‘라고 부르기도 했다. 라임은 이처럼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었다.
하지만 괴혈병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던 여러 지역의 뱃사람들은 이런 과학적 지식 없이도 오래전부터 나름의 예방법을 지켜오고 있었다.
북해와 발트해에서 청어 잡이에 나섰던 독일과 네덜란드의 선원들은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배에 싣고 다녔다. 양배추 절임인 사우어크라우트는 보관을 오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괴혈병이라는 정체 모를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항해하는 선박에 사우어크라우트를 가득 실었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북부에 살던 이누이트족도 경험을 통해 괴혈병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누이트족은 비타민C가 풍부한 바다표범의 생간을 즐겨 먹었기 때문에 이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다.
명나라 시절인 1405년~1433년 정화가 이끈 원정대가 일곱차례에 걸쳐 아프리카 지역까지 원정을 떠났지만 괴혈병으로 고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타민C가 풍부한 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들은 차를 확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땅을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 카레라이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가 1860년에 쓴 <증정화영통어(增訂華英通語)>에 커리(curry), 즉 카레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872년 간행된 <서양요리지남>이라는 책에는 카레라이스 요리법이 소개됐다.
일본 사회에 도입된 카레라이스가 대중화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카레라이스를 급식 메뉴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들 사이에는 다리가 붓고 심하게 아플 뿐 아니라 근육이 약해져 비틀거리며 걷게 만드는 각기병이 유행했다.
각기병의 원인을 발견한 사람이 앞서 비타민 발견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에이크만 교수였다. 그는 네덜란드 해군 군의관으로 1887년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파견됐는데 그곳에서 각기병에 시달리는 선원들을 조사해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군은 쌀눈을 제거하지않은 쌀밥에 카레를 얹은 카레라이스를 군대 급식으로 선보였다. 이로써 각기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카레라이스에 비타민C가 많은 감자를 넣은 덕에 덤으로 괴혈병 예방 효과까지 있었다.
일본 해상자위대 대원들에게는 지금도 매주 금요일 점심으로 카레라이스가 배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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