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친분이 있던 의사가 대뜸 이상한 약물을 건넨 직후였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의사는 빙그레 웃습니다. “시가 안써진다면서? 도움이 될 텐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창작의 고통에 펜을 들었다 놓았다 한 지 벌써 수개월째. 펜촉은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져 있었지요. 휴지통에는 줄을 작작 그은 습작만 그득합니다. 명작(名作)을 쓸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의 나날이 이어졌지요. 다시 그 의사의 집에 찾아갑니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네.” 그는 마치 시인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시인을 한 방으로 안내했지요. 잠시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대의 예술가들이 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름도 유명한 ‘해시시 클럽’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시인은 마약인 해시시를 끼고 살아갑니다. 집필할 때도, 작품을 완성할 때도 그 옆에는 항상 약물이 있었지요. 해시시클럽의 일원이 되어서였습니다.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약에 빠진 예술가, 오늘날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키워드입니다. 비단 현재만의 이야기는 아닌가 봅니다. 보들레르와 해시시클럽을 보며 든 생각입니다.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오는 26일은 국제 마약 오남용 방지의 날입니다.
저주받은 시인의 표상 샤를 보들레르
“저주받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우울한 예술가였습니다. 권태와 우울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서였습니다. 특히 그는 전 세계가 선망하는 도시였던 19세기의 파리에서 “밤보다 더 서글픈 검은 빛”을 발견한 이였지요.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낭만의 도시로 통하지만, 19세기에는 더욱 찬사를 받았습니다. 증기기관이 부른 교통혁명에 산업과 금융이 발달하면서 막대한 부가 쌓여갔기 때문이었지요. 밤에도 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카페, 밤에는 캬바레에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인류는 영원히 진보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찬란한 변혁이었습니다.
당대의 예술가는 파리의 유쾌한 증언자가 되는 데 앞장섰습니다. 마네, 모네, 드가와 같은 화가들이 파리지앵들의 흥겨운 일상생활을 미학적 주제로 채택한 것만 봐도 그렇지요. 이 시대를 프랑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도시의 발달이 불러오는 ‘혼돈’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파리를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세계”라고 단언했지요. 보들레르의 눈에 파리지앵이란 유령처럼 걸어다니는 행인이었고, 파리라는 도시는 악몽과도 같은 고통과 비애가 떠도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에 수록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하늘이 낮고 무겁게 짓누르며 토굴처럼 축축한 땅 위에 세워진 도시, 이곳은 밤보다 더 서글픈 검은빛을 띈다.”
파리의 발전 속에서 개인의 불안을 포착하다
산업혁명의 장밋빛 장막을 걷어낸 보들레르의 표현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매연이 안개처럼 떠돌고··· 금속이 부딪치며 내는 소음들이 표류하는 세계, 이곳에선 희망이 파기돼 사라질 뿐이다.” 그 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젖을 빠는 사람”들이라면서 연민의 눈길을 보냅니다. 그의 시적 표현을 ‘검은 수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였지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함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셈입니다.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인간은 탈주를 꿈꾸기 마련입니다. 예민한 감성의 예술가들은 더욱 그러했지요. 보들레르에게 도피처는 마약의 세계였습니다. 한 의사의 권유로 해시시 클럽에 가입했지요. 당시 대마초의 일종인 해시시의 위험성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는 이 약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1840년대, 그의 나이 고작 20대 초중반인 시기. 그의 작품 대부분이 약물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약에 빠져 있는 건 보들레르만은 아니었습니다. 동료들인 ‘해시시 클럽’의 일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소설가 뒤마(삼총사),발자크(인간극), 위고(레미제라블)가 해시시 클럽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화가 들라크루아도 이들과 어울린 사람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파리의 호텔에 모여 단체로 환각의 세계로 빠졌지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수많은 명작이 해시시의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보들레르는 특히 환각에서 느낀 세계를 찬미합니다. 검고(Noir) 음산한(Lugbre) 파리에서 벗어나 약이 주는 환각에 몸을 기댔지요. 이때의 경험을 담은 책이 1860년에 발간한 ‘레 파라디 아티피시엘’(인공낙원). “매우 경이로운 도취에 이르렀다”고 그는 기록합니다. 동시대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는 “검은 도시로부터의 도피가 보들레르가 환각에 빠진 주요 동기”라고 말했습니다.
불운한 가정사가 어두운 예술의 동력으로
보들레르가 태생부터 어두움을 타고 난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정사에는 결핍이 있어서였습니다. 잠시 그의 가정사를 들여다보시지요.
“어머니, 저를 사랑해 주실 순 없는 건가요?”
보들레르는 조제프 프랑수아와 카롤린의 사이에서 1821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제프의 나이 60세였던 해였지요. 어머니 카롤린은 26살의 꽃다운 청춘. 당시 평균 연령을 고려하면, 부부의 사별은 처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이별은 불현히 찾아옵니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 조제프가 세상을 떠납니다. 보들레르의 나이 고작 6살. 아버지를 거울삼아 세상을 이해해야 할 시기였지요. 어머니 카롤린은 생계의 막막함을 느꼈을 겁니다. 서른을 갓 남긴 나이, 아이가 있는 과부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요. 결국 재혼을 택합니다. 육군 중장이었던 자크 오픽이 그의 새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보들레르는 자크 오픽과 썩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화가의 아들로 자유로운 그와 군인은 조화할 수 없는 조합이었지요. 새아빠는 아들이 규율을 지키길 바랐고, 보들레르는 이를 혐오했습니다. 두 남자의 갈등 사이에서 어머니는 자크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야만 했습니다.
시인이 된 보들레르는 어머니 카롤린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제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응답받지 못했다는 보들레르의 서운함이 행간에서 묻어납니다. 카롤린의 재혼이 보들레르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 리옹에서 다닌 학교에서도 그는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친구와 선생님은 침울한 보들레르를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어린 시절부터 삶의 환희와 공포의 양면적 감정을 걸어온 것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삶은 저주받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약, 매춘, 알코올에 빠진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자신의 우울을 방탕한 삶으로 달랬습니다. 수도 없이 매춘부를 사귀었고, 옷을 사는 데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지요. 당대 유명한 혼혈 여배우 잔 뒤발과 연애를 했지만 가족에 반대로 헤어지게 되면서 그의 삶은 더욱 타락해져 갔습니다.
불우한 환경은 때론 인간을 무너뜨리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이를 창조의 원천으로 삼아가기도 합니다. 보들레르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시는 고통과 전율, 히스테리와 쾌락으로 가득합니다. 당시 대중에는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주제였지만, 일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식이었습니다.
1857년, 그의 나이 36살, 그의 첫 시집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 출간됩니다. 우울과 냉소가 기본이었던 그도 일말의 희망을 품었겠지요. 하지만 세상은 그의 시만큼이나 차가웠습니다. 섹스, 죽음, 레즈비언, 변태, 우울, 도시의 부패, 삶의 억압이 담긴 이 책을 프랑스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던 것이지요.
“타락한 쓰레기”라는 평론계의 조롱이 이어졌습니다.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기소돼 벌금형과 함께 유죄 판결까지 받게 됐지요. 시집은 가까스로 출간됐지만 6편이 삭제된 채였습니다.
“시인의 왕”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다
매독과 약물 중독, 보들레르의 삶의 빛은 서서히 희미해져 갑니다. 그의 시는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빈곤에 따른 스트레스에 그는 점점 지쳐갔지요.
하나의 위안이 되었던 건 어머니와의 관계회복이었습니다. 의붓 아버지가 죽고난 뒤 둘은 함께 살게됐지요. 평생 느끼지 못했을 사랑을 보들레르는 경험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사랑이 주어졌다면, 지금의 보들레르는 없었겠지요. 다만 그는 조금 더 행복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1867년 3월, 그가 결국 눈을 감았지요. 그의 나이 고작 46세였습니다.
시대를 정의하는 예술가가 그러하듯, 보들레르 역시 사후에 더 인정받는 시인이었습니다. 새로운 감정을 끌어내는 그의 저작을 문학계가 인정하면서였지요. 실존적 불안을 포착하는 그의 예민한 감각에 세계가 조응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죽은 지 4년 후인 1871년 시인 아서 랭보는 보들레르를 “시인의 왕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시인”이라고 찬양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19세기 최고의 시인”이라고 상찬했지요. 멜랑콜리는 더 이상 비주류적 감성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어머니 카롤린 역시 그의 시집 판매가 급증하면서 상당한 부를 쌓게 됩니다. 보들레르가 생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지구를 대표하는 소리가 된 보들레르의 시
1977년 9월 5일, 미국 나사가 우주 탐사선을 발사합니다. 보이저 1호였습니다. 인류가 자랑할만한 작품을 황금색 LP디스크에 녹음해 로켓에 실었지요. 지구의 소리(The Sounds of Earth)였습니다. 이곳에 실린 작품이 보들레르의 ‘비상’(L‘elevation)입니다.
보이저 1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자로 아직도 여행하고 있지요. 우주의 고등 생명이 우리를 만난다면, 보들레르의 시부터 만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만날 시를 여러분께도 공유합니다.
연못들, 계곡들, 산들, 숲들 구름들, 바다 위로,태양 너머로, 창공 너머로, 별들의 천구 너머로,나의 정신, 너는 민첩하게 움직이고, 파도 속에서 황홀해지는 헤엄 잘 치는 사람처럼, 너는 말로 할 수 없는 남성적 쾌락을 느끼며 그 방대하고 깊은 곳을 즐거이 누비고 다니는구나.
PS. 마약에 찌든 예술가들을 우리는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비틀스, 에릭 클랩턴, 에미넘 같은 음악가들도 약에 취한 채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BBC가 만든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도 PD들이 약물에 찌든 채로 제작됐다는 폭로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예술”을 핑계 삼아 마약에 손대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보들레르의 시대와 달리, 우리는 마약의 위험성과 파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환각의 힘을 빌려 만든 예술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체육계에서 도핑을 반칙으로 규정하듯, 예술 또한 같은 잣대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네줄요약>
ㅇ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으로 통하는 보들레르는 약물에 찌들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해시시 클럽‘이었다.
ㅇ클럽에 함께 했던 수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뒤마, 위고, 발자크, 들라크루아였다.
ㅇ불운한 가정사가 보들레르의 우울한 예술의 원천이 됐다.
ㅇ그럼에도 마약은 용인받을 수 없다.
<참고문헌>
ㅇ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민음사, 2016년
ㅇ주현진, 19세기 우울과 환각:보들레르 환각체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프랑스학논집, 2020년
ㅇ조현진, 보들레르 작품에 나타난 문학적 어머니, 인문학 연구 통권 114호,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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