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나워에서 메르켈까지…기민련 역사로 본 독일 정치의 속사정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한국사회에는 독일 정치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있다. 예컨대 독일 총리들에 대해 두 권의 책(<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을 쓴 김황식 전 총리는 지난해 9월 국회 강연에서 "독일이 숱한 전쟁과 나치만행, 국토분단 등 역사의 비극에도 이를 극복하고 유럽의 선도 국가이자 균형 잡힌 모범국가로 발전하게 된 원인은 독일정치에 있다"며 "다양한 정치세력간의 권력분산", "대화와 타협의 전통", "시대적 소명을 감당한 성공한 총리"를 독일 정치의 교훈으로 꼽았다.
조성복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도 <독일 정치, 우리의 대안>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다당제, 의회중심제가 중심인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독일 정치를 소선구거구 단순양당제, 대통령중심제의 '다수제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한국 정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중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한국사회에서 선거제 개혁 논의가 일 때마다 거의 반드시 언급되는 제도이기도 하다.
문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쓴 <독일현대정치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우선 이 책의 부제가 "아데나워에서 메르켈까지, 기민련을 통해 본 정당국가 독일"이라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70년 간 치러진 연방의회 선거 가운데 단 4번을 제외한 16번의 선거에서 집권 여부와 무관하게 제1당"이었던 독일 기독민주연합, 그 중에서도 당 대표들의 정치 이력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독일 정치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감 있게, 또 흥미진진한 필체로 소개한다.
독일 정치의 빛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에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전하자면, 의외로 이를 드러내는 현상은 총리의 '장기집권'이다.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14년(1949~1963), 3대 총리 헬무트 콜은 16년(1982~1998), 8대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16년(2005~2021) 집권했다.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이래 73년 동안 3명의 총리가 도합 46년 간 권좌를 지킨 셈이다.
독일 총리의 장기 집권에 대해 저자는 먼저 "'풍부한 경험과 경륜'이 유실되지 않고 '소신과 철학'을 가진 정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중후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해석"한 김 전 총리의 견해를 적고 "아데나워뿐만 아니라 콜과 메르켈 등이 모두 집권 1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경륜을 쌓은 뒤 성과를 냈다"고 평한다.
그리고 다른 견해를 낸다. "아데나워와 콜은 임기 어느 시점부터인가 부패와 스캔들로 점철되고 여론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퇴임 직전의 메르켈에 대하여 콜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비판이 거셌다는 점도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저자는 "권력의 근처와 정점에 오래 서 있는 개인이 법인카드와 관용차의 안온함에 익숙해지지 않고 업무 수행 능력만 신장시키기를 기대해도 좋을까?"라고 묻는다. "기민련의 구체적인 재정 운영 방식도 소수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베일에 싸인 편에 가깝다"고도 지적한다.
이뿐이 아니다. "집중화로의 집요한 관성"이라는 권력의 속성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은 독일 정치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권과 대권의 분리"를 외쳤던 콜은 "총리가 된 후 당 대표와 총리직을 겸직"했다. 메르켈도 "총리 재직 시기 거의 내내 당대표직을 유지했고, 당 사무총장에 측근을 앉히기 위해" 노력했음은 물론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분리하자는 당내 분위기에 힘입어 당대표가 된 뒤에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원내대표를 몰아내고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혔다.
"압도적으로 존재감이 큰 총리와 당 대표"는 "나치와 같은 강력한 정치권력의 출현을 막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 독일의 강력한 지방분권 구도와 결합해 허약한 중앙당 조직으로 이어진다. "지역 조직이 중앙당의 완전한 하부 조직이 되는 방식의 '체계화'는 기민련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취약한 기민련이 "하나의 정당으로서 활기"를 되찾을 때는 정권을 빼앗기고 불안정해질 때였다. "이처럼 권력이 집중된 구도 아래서 권력교체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2005년 이후 독일의 정치 현실도 녹록지 않다. 2019년의 한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과반수가 "독일 민주주의에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독일 정당에 대한 신뢰도는 23%"에 불과했고, 정치인들이 "다음 선거만 생각한다"는 답은 84%에 이르렀다. 메르켈 집권기 '성장하는 경제, 심화하는 소득불평등'이라는 조건 속에서 난민 유입을 기회 삼아 구 동독 지역에 집중된 불안정 노동자를 파고들며 성장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은 "2017년 12.6%, 2021년 10.3%"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저자가 비판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아데나워 뒤에는 "회의적인 세대", "개혁적인 45년 세대", 68혁명 뒤에는 "대안 68세대", 통일 뒤에는 "구 동독 출신 정치가"들이 나타나 "당에 새로운 색깔을 입혔다"며 독일 정치의 쇄신 과정을 강조한다. 독일 정치를 "청년의 치유할 수 없는 이상주의와 노년의 치유할 수 없는 지배욕 사이"의 투쟁이 "끝없이 이어진" 역사라고 요약한 영국의 평론가 존 캠프너의 글(<독일은 왜 잘 하는가>)도 인용한다.
저자가 정치인을 향한 무조건적 불신을 경계하는 점도 눈 여겨 볼만하다. "관록의 정치인"을 "'손을 더럽힌 것'으로 평가"하는 인식에 대해 저자는 "정치가 초보일수록 높이 평가받는 직무일 뿐이라면, 우리 모두의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며 "정치의 본질적인 특성인 복합성, 다양성, 모호성에 개인의 타고난 지력이나 직관으로 맞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해당 정책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는 별개로 실제 기민련 정치인들은 공동결정법(회사의 인사‧노무 등에 대해 노사가 공동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한 법) 같은 독일 고유의 제도를 확립하고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풍랑 속에서도 이를 유지했다. 메르켈이 여성할당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부모휴가법안' 등 여성의 사회활동 촉진과 가족구조 변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독일에 "1965년 이후 처음으로 베이비붐"을 일으키고 여성고용률을 2006년 64%에서 2019년 73%까지 끌어올린 것도 평가할 만하다.
이밖에 저자는 기민련 당 대표들의 정치 활동을 줄기로 초기 반공주의 정당, 선거 정당, 이질적인 사회조직들의 느슨한 연합에 가까웠던 기민련의 현대 정당으로의 변모 과정, 콜 집권기 독일 통일, 메르켈의 난민 정책 등을 균형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이를 한국 정치의 대안으로 독일 정치에 접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현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에서 다른 면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보론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매끄럽게 읽힌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니 독일 정치를 입체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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