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욕망의 시대가 낳은 ‘킬러 문항’

천남수 2023. 6. 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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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지난 19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 이른바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을 배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우유를 좋아하고 늘 화분을 들고 다니는 사람. 매우 순수해 보이는 이 사람은 냉혹한 킬러다. 1995년 개봉된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 얘기다. 장 르노가 주인공 킬러로 출연한 이 영화는 옆집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르만 분)가 부패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족의 원수를 갚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0대 딸을 둔 엄마. 평범한 이벤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청부살인이 본업인 킬러다. 지난 3월 넷플릭스에서 개봉된 변성현 감독의 영화 ‘길복순’이다. 전도연이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이자 냉혹한 킬러역을 맡았다.

킬러(killer). 살인 청부업자를 뜻하는 이 말은 성능이 확실한 물건이나 영향력이 높은 사람을 수식하는 표현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어떤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킬러 콘텐츠, 연예기획사에서 음원 성적이 좋은 가수를 가리키는 음원차트 킬러, 시험에서 어려운 문제를 뜻하는 킬러 문항이 그것이다. 비즈니스 용어로서는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선순위를 높게 취급해야 하는 대상을 ‘킬러 아이템’이라고 한다.

오늘 킬러 얘기를 꺼낸 것은 이른바 ‘킬러 문항’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수능에서 킬러 문항 출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킬러 문항은 입시나 공무원 시험 등에서 출제되는 문제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틀리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한 초고난도 문제를 말한다. 킬러 문항은 상대평가 특성상 상위권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출제된다. 일반적인 수준의 학습 능력을 갖췄는지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비율의 수험생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킬러 문항을 풀기 위해서는 고도의 실력을 갖춰야 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실제로 일정 비율을 걸러낸다는 것은 특정한 비율만을 선택하겠다는 말이 된다. 그 역할을 킬러 문항이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문항이 필요할까. 말할 것도 없이 높은 점수를 받은 응시자가 많으면, 제한된 일정 비율만 합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입시경쟁에서 경쟁률이 높은 대학이나, 공무원과 대기업 등 취직시험 등에 해당된다. 이에 따라 어떤 형식의 킬러 문항이 출제될 것인지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킬러 문항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는 강사는 일타강사로 불리게 됐고, 그 강사는 부와 명예를 얻는 세상이 됐다.

킬러 문항 논란을 보면서 문득 이 문제도 인간의 욕망과 직결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욕망(欲望)은 무엇인가.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는 식욕, 성욕, 모방, 호기심, 투쟁 등을 본능이라고 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욕망을 단순히 선천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기본적인 욕구라고 분석했다. 생리적 욕구인 식욕과 배설욕, 수면욕, 성욕과 함께 사회적 욕구인 인정의 욕구, 애정의 욕구, 자존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으로 구분한다.

▲ 욕망은 본능적이기도 하고, 시회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지향한다.

어찌 보면 욕망은 사람이 만족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할 때 얼마만큼의 돈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또한 돈이 많다고 인간의 욕망이 채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돈이 많으면 그 돈을 과시하고 싶어질 것이다. 돈이 많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임으로써 자신의 권위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나서거나, 언론매체를 소유하려는 것도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과연 부와 권력을 갖게 된다면 욕망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권력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다. 물론 욕망의 전부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과 권력에 눈을 돌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건강 역시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건강은 돈과 권력만 있으면, 매우 고차원적으로 유지 관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돈과 권력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다만 그 길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원한다고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제로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이렇게 넋두리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우리 사회가 욕망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머리로는 정의를 생각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가슴에는 욕망이 가득하다. 욕망을 갖는 것은 짧지 않은 인생에서 필요한 일이긴 하다. 지금은 남보다는 내가 특출해야 인정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본능에 가까운 욕심으로 가득한 ‘욕망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흙수저 출신들은 대입 과정에서부터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입시 과정에서 계층 상승을 이뤄줄 비상계단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킬러 문항’이기 때문이다. 킬러 문항은 본질적으로 수학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함정이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돈과 권력의 힘이 받쳐줘야 ‘킬러 문항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더 큰 그들만의 욕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출제 금지’ 발언이 논란이 됐지만, 원칙적으로 킬러 문항은 비교육적이다. 정치권도 이를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사실 이런 공방은 킬러 문항으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입시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실책을 확대 재생산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정치권의 공방은 욕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려는 행태인 까닭이다. 결국 욕망이 가득한 시대가 킬러 문항을 낳은 셈이다.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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