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원나라와 함께한 와인의 흥망성쇠

박현주 미술전문 2023. 6.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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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화=신화/뉴시스] 중국 지린(길림)성 동북부 퉁화시 지안에서 한 기자가 아이스 와인을 만드는데 쓰이는 냉동 포도를 촬영하고 있다. 2016.1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00만명이 채 안됐던 몽골인들은 지배층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원나라를 비롯 세계 인구의 반을 통치했다. 특히 대 칸의 직할인 원나라는 한족(漢族)을 혹독하게 통치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남송(南宋) 출신 한인들은 남인(南人)이라 불리며, 사회 최하층 계급인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원나라 인구의 80%에 달하는 6000만명이나 됐다. 갑주(甲主)라 불리는 몽골군 한명이 한인 20가구(약100명)를 관리했다.

원나라 말기, 이에 저항한 한족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홍건적의 난’이다. 이어 홍건적 출신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1368년 원나라 수도 대도를 점령하고 명나라를 건국한다. 원나라 왕실은 몽골 초원으로 쫓겨났다. 고려 공민왕 16년때다. 이후 고려는 ‘북원’(北元)이란 이름으로 20년간 더 존속한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친명정책을 유지한다.

명나라는 한족이 건국한 중국의 두번째 통일 왕조다. 소위 ‘중화사상’의 중심은 한족이다. 2020년 중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54개 소수 민족이 포함된 중국인의 91.1%가 스스로를 한족으로 분류했다. 한족이 세운 첫번째 통일 왕조인 한(漢)나라를 그 기원으로 본다. 하지만 유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한족의 근거는 애매하다. 중국과학원도 한족은 혈연적 연대라기보다는 단지 문화적 공동체라고 했다. 한족의 유전자에는 선비, 흉노, 돌궐, 몽골족의 북방계와 베트남, 라오스에 분포하는 남방계 민족의 DNA가 모두 섞여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5000년 중국 역사 중 순수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한나라 405년과 명나라 276년을 합해 681년에 불과하다.

전쟁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기 전인 1358년 이미 금주령을, 1366년 술의 원료가 되는 찹쌀의 재배를 금했다(‘명태조실록, 권6’). 건국 초기에는 술의 양조와 유통을 전면 금지했다. 자신은 술을 좋아했지만, 술에 들어가는 미곡의 소비를 줄여 식량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원나라 시대 곡주의 미곡 소비를 줄이기 위해 와인의 생산을 장려한 것, 고대 로마에서 한때 포도원이 늘어 밀의 경작지가 줄어들자 거꾸로 포도원을 갈아엎었던 것과 비슷한 배경이다. 1373년(홍무제6년)에는 주요 와인 산지인 산서성 태원에서 황제에게 올라오는 와인의 진상을 몸소 금했다(‘속문헌통고 권22, 정각고’). 주원장이 와인을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태원 와인은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도 좋아했다. 주원장은 아끼는 장군인 호대해(胡大海)의 아들이 금주령을 범하자 목을 벨 정도로 엄격하게 금주령을 시행했다(‘명사 호대해 열전’).

하지만 금주령은 사회가 안정되자 홍무제 초년(1368년)에 곧 폐지됐다. 대신 주세를 개편했다 (‘대명회전’). 원나라 시절 곡주의 주세는 보통 판매액의 25%였다. 포도주는 6%였는데 나중에 3.3%로 낮추어 우대했다(‘신원사’). 포도주는 ‘계각화’(系榷貨)라는 관청에서 전매하고, 주세는 국세청 격인 ‘대도주사사’(大都酒使司)가 징수했다(‘원전장’).

원나라 때는 누룩과 쌀을 사용하지 않은 정통 와인이 가장 성행한 시기였다. 금주령이 해제된 명나라에서는 술에 대한 국가의 전매제도를 폐지하고 민간에서 술을 자유롭게 양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주세도 통합하고 대폭 낮추어 곡주와 포도주 구별없이 판매액의 3.3%를 징수하였다. 누룩에는 2%를 부과했다(‘명사’ ‘식화지’). 술과 양조 방식이 비슷한 식초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탈세하는 자는 곤장 50대와 함께 판매액의 50%를 몰수했다. 또 이를 신고한 자에게는 물품 가액의 30%를 포상했다(‘속 문헌 통고 권28, 정각고’).

이로 인해 우대가 없어진 와인의 유통은 상대적으로 저조해지고 각 지역별로 곡주와 각종 과일주가 번성했다. 명나라 초기 기록에 나오는 술의 종류만 26종이나 된다. 산서성의 소주와 절강성의 황주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북방지역에서는 여전히 와인이 생산됐다. 하지만 신장지역 등 옛날의 서역은 통제를 잃어 와인의 조달이 상당히 위축됐다. 서역의 통제권은 청나라가 들어선 후 다시 회복된다.

원나라 시절 고려에서 와인은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과 몽골의 쌍성총관부가 들어선 국경 부근의 북부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유통됐다. 하지만 원나라의 몰락에 따른 중국사회의 변화, 조선의 정권교체가 일어나자 이후 중국과의 교류 및 소비는 거의 중단된다. 고려시대 말 나타났던 와인 관련 기록이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1500년대 중반까지 다시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 와인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것이다. 고려사는 1451년, 고려사절요는 1452년에 편찬됐다. 또 이색의 목은시고는 1626년, 안축의 근재집은 1740년 간행됐다.

포도를 표현하는 한자는 현재 중국, 일본, 베트남, 우리나라에서 모두 ‘葡萄’로 표기하고 있지만 중국 문헌에는 시기에 따라 ‘蒲桃’ ‘蒲陶’ ‘蒲萄’ 등 각종 다양한 표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서의 경우 고려사에는 ‘蒲萄’로, 고려사절요부터는 쭉 지금과 같은 ‘葡萄’로 표기돼 있다. 중국에서도 16세기 이시진이 펴낸 본초강목(1596년 간행) 이후에는 현재의 표기로 통일됐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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