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왜 일본을 더 좋아할까? [같은 일본, 다른 일본]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서양 사람들에게 일본은 매혹적인 이국(異国)
한국 사회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배울 점도 있는 나라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침략과 전쟁을 일삼는 말썽쟁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공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양 사회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예를 들어, 서양인의 눈에 비치는 일본 문화는 정적(静的)이지만 심오한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고, 일본 공예품의 미학은 독특한 개성이 있다. 일본인은 수줍지만 예의 바르고, 내성적이지만 성실하다.
서구에서 일본이 매혹적인 이국(異国)으로 자리 잡은 역사도 길다. 19세기 서유럽에서 일본의 미술품과 공예품이 수집가들의 고상한 취미로 유행하면서 ‘자포니즘 (Japonism, 일본풍)’이 인기를 끌었고, 실제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인 마네, 고흐 등이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요즘에도 미래지향적인 예술 작품이나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디자인에 ‘일본풍’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한때 서구 사회가 ‘일본인은 경제적인 동물’이라고 야유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 조롱의 이면에는 일본의 경제적, 기술적 성장을 인정하는 정서가 있었다. 섣부른 일반화는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일본은, 적어도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보다는, 훨씬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을 찾는 서양인과 만날 기회가 잦았다. 사업이나 연구 등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 문화에 강한 호감과 호기심을 가진 순수한 ‘일본팬’이 의외로 많았다. 예를 들어, 여백을 중시하는 일본 전통 건축을 좋아한다든가, 일본사나 불교 철학에 정통하다든가, 일본의 공예품과 다도, 꽃꽂이 등 전통 미학에 관심이 있다든가 등 일본 문화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존경이나 관심을 표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을 통해 일본에 대한 호감을 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일본을 찾는 모든 서양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 일본을 보는 미묘하게 빗나간 시선
몇 년 전 도쿄의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큼직한 여행 가방을 든 서양인 여성이 좌석에 앉아서, 신기한 표정으로 창 밖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때마침 한 할머니가 전철에 올라타 그녀 근처에 섰다.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에게 좌석을 권했다. 할머니는 몇 차례 점잖게 사양한 뒤, 마지못해 자리를 앉았다. 그러자 서양인 여성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할머니에게 깊숙이 절을 한 뒤, 지하철 한구석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창 밖을 바라보면서 뿌듯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이 흡족해 보였다.
이 광경이 내게 이색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 손을 모아 손윗사람에게 공손히 절하는 모습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나는 예전에 서울에서 지하철로 통근하면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런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는 노인이 많지 않았다.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가 내내 좌불안석이어서 도리어 양보한 내가 무안해진 적도 있었고, 좌석에 앉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을 위해 일부러 경로석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는 할아버지도 많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에는 “자리에 앉으시겠느냐?”고 미리 물어보아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한 뒤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사실 지금의 일본 사회에서는 아시아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예절이나 공동체적 가치관보다, 공사 구별이 확실하고 개인의 결정을 우선시하는 서구 문화의 개인주의가 더 지배적이다. 그 서양인 여행객은 그런 사정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손윗사람을 깍듯이 높이는 ‘동양’의 예의 바름이 일본 문화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모처럼 일본을 여행 중인 만큼 ‘동양’의 예의를 실천에 옮겨본 것이리라. 아쉽게도 그녀의 대담한 시도는 오히려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는 ‘웃픈’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렇게 말은 해도,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정도의 편견이라면 ‘무해’하다. 오히려 진지한 여행자라면 이런 귀여운 실패를 한 번쯤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다만,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왜 그런 편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인다.
◇ 현대 일본 사회와 ‘테크노-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0년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태도를 비판한다. 동양을 뜻하는 ‘오리엔트(orient)’에서 파생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원래 이국적 정서에 대한 남다른 호기심이나 취향을 뜻했다.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는 것이 사이드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제국주의 시절에 ‘서양’ 문명은 합리적, 이성적, 남성적, 평화적이며 도덕적으로 성숙한 반면, ‘동양’ 문명은 비논리적, 미신적, 감성적, 여성적이라는 인식이 부지런히 재생산되었다. 식민주의는 열등한 ‘동양’을 우월한 ‘서양’으로 이끄는 정당한 과정이라는 합리화가 이루어지면서, 반인권적 행태와 폭력성은 교묘하게 은폐되었다.
사실 우리는 동양 하면 중국 대륙이나 한국, 일본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사이드가 주로 언급하는 동양은 인도와 아랍 문화권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서양에 가깝게 인식되는 서아시아 지역이, 유럽의 관점에서는 동양의 대표 주자인 것이다. 타문화에 대한 자의적인 선긋기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이드의 비판에는 이견이 없지만, ‘서양’이니 ‘동양’이니 하는 이야기 그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의 모순을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무력을 내세운 노골적인 제국주의는 쇠퇴했고, 예전처럼 ‘동양’을 열등하고 미성숙한 문화로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은 지금도 자주 언급된다. 지금도 타자에 대한 대상화와 왜곡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 사회가 일본을 보는, 미묘하게 왜곡된 시각을 ‘테크노 오리엔탈리즘(techno-orientalism)’으로 자리매김하는 학자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의 디지털 기술이 약진하면서, 일본의 테크놀로지가 미래의 기술 사회를 선도한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일본의 기술적 우월성을 인정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속사정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앞으로 더 밝고 행복한 유토피아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결국 ‘서양’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휴머니즘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미래 사회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타자로 자리매김되는 일본의 상징과 수월하게 결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인간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에 일본 문화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상징 분석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실 일본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일본에 대한 서양 사회의 시선 속에 타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뿌리 깊다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것이 과연 서양인과 일본인의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국지적인 사안일까? 자기와 다른 주체를 타자로서 대상화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지 특징이다. 하지만 글로벌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타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연관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오해가 편견으로, 편견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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