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수많은 더블의 향연

2023. 6.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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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금색공책'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고전 '금색공책'을 쓴 영국의 작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이 2006년 독일 쾰른 문학제에 참석한 모습. 위키피디아 커먼스

페미니스트 바이블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때는 여성해방 ‘운동’의 살아 있는 고전이었다. 출간 당시에는 그런 작품을 쓴 작가가 남성 혐오자이거나 볼브레이커로 매도되었다. 찬사와 비판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소설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대이고 책은 1962년에 출간되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여자는 뭐든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시퍼렇게 살아 날뛰던 시절이다. 많은 남성 작가들은 여성을, 남성을 괴롭히고 배신하며 권위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기력을 소진시키는 혐오스러운 존재로 그렸다. 그런 인식이 팽배했던 문학판에서 이 소설은 거침없는 ‘자유로운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충격을 주었다. 여성의 금기를 과감하게 깨뜨리며 구조적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무의식의 저변까지 샅샅이 훑는다. 사랑과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관점으로 상대방 남성에 대한 평가도 서슴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질 오르가슴을 느끼지만 사랑이 사라진 뒤에는 음핵 오르가슴으로 대체된다면서. 가부장제가 주입시킨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 여자 몸의 불편함, 성욕과 섹스의 거짓과 진실에 대한 사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했던 천상병 시인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다섯 개 장 제목이 ‘자유로운 여자들’이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거듭 호명된다. 주인공인 작가 애나 역시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글을 써내지 못하고 꽉 막혀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지 모른다. 사회생활하는 인간이라면. 사회적인 나와 개체로서의 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열린 미래를 지속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인 도리스 레싱도 출간된 지 3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거기에 ‘쏟아부은 미쳐 날뛰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읽기 위한 작품을 넘어 실행하기 위한 ‘운동’ 매뉴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뒤늦긴 했지만 거기에 충전된 엄청난 에너지가 2007년 노벨문학상을 수여케 했을 것이다.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은 갈등을 차단하면서 안정을 추구한다. 편협한 세상에 안주하며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그런 인물들이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작가 애나 울프는 아무리 사소해도 철저하게 회의하며 묻고 답하는 과정을 끈질기게 되풀이한다. 이 소설은 그 경험을 ‘진실에 가까운 표현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1984년 도리스 레싱의 모습. 위키피디아 커먼스

그 방식이 사뭇 흥미롭다. 주인공인 작가는 이 작품의 작가인 도리스 레싱의 더블이다. 소설에서 더블이란 같은 특성과 가치관을 가진 둘 이상의 존재를 가리킨다. 작가의 일대기를 훑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프리카와 영국이라는 배경이나 한때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그렇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사랑하고 절망하며 다시 희망을 찾아간 작가의 일대기로 읽힌다. 작가도 자서전을 쓰면서 픽션이 진실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형식은 메타소설이다. 이중 삼중의 더블이 수없이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작가 애나는 데뷔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경제적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데뷔작은 거짓되며 부도덕하다고 여긴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작품을 써내지 못해 괴로워한다.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네 개의 관점으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다. 네 권의 공책에 나눠서 기록한 것이다. 작가 애나에 대한 사실들은 검은색 공책에, 특히 정치에 대한 경험과 의견은 빨간색 공책에, 픽션은 노란색 공책에, 그리고 기록의 일차 자료로서 일기는 파란색 공책에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대단원으로 읽히는 내용이 담긴 금색공책이 등장한다.

다양한 색깔의 공책. 게티이미지뱅크

검은색 공책은 ‘어둠’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주인공 애나의 성공적인 데뷔작인 '전쟁의 접경지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 데뷔작의 상업적인 성공과 작품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아프리카 시절의 인물들에 얽힌 에피소드가 시시콜콜 소환된다. 작가로서 애나는 그 이야기를 공책에 기록하면서 자신의 글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한다고 느낀다. 그것이 소설 속의 주인공인 작가 애나가 새로운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빨간색 공책에는 애나가 환멸을 느끼게 된 영국에서의 공산당 정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실체가 아닌 허구적 이념에 매몰되어 있던 1950년대 운동가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집안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수많은 여자들을 목격한다.

노란색 공책에는 ‘세 번째 그림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소설 원고 같아 보인다. 읽어보면 확실히 소설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작품, '금색공책'의 요약본이다. 작품 더블이 거기에 쓰여 있는 것이다. 메타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중편소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중편 소설의 복잡다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여주는 장편소설이 '금색공책'인 셈이다. 소설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소설 속의 소설 작품도 삼중 더블이다. 참고로 한국어판 번역본에는 ‘제삼자의 그림자’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로는 The Shadow of the Third이다.

정교하게 잘 짜인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작가가 선택한 ‘진실의 표현 방식’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삶은 수많은 갈등과 타협의 연속이다. 하나의 자아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초점으로 그려낸 단아하고 깔끔한 이야기는 진실의 파편일 뿐이다. 그 자체로 거짓은 아닐지 모르지만 복잡다단한 진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저절로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작품과 작품을 쓰기 위해 수집한 자잘한 사실들을 전부 보여주면 어떻겠는가? 이 작품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파란색 공책에는 자신의 논픽션 경험을 자꾸만 픽션으로 바꿔 쓰는 습관 때문에 생기는 은폐와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 일기 형식으로 쓴 글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심리상담자인 마더 슈거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기대되는 새로운 더블, 이성인 더블이 등장한다. 분열된 자아가 통합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 모든 장치들이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어느 하루를 꼼꼼하게 기록해 보기도 하고, 신문들을 모아서 스크랩으로 방을 가득 채우는 지독한 광증을 보이기도 한다.

이 네 권의 노트가 작가 애나의 ‘분열된 모습’이라면 통합될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금색공책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노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이 노트들은 다섯 개 장, ‘자유로운 여자들 1~5’에 담겨 부분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의도가 정교한 형식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금색공책·도리스 레싱 지음·권영희 옮김·창비 발행·576쪽·1만8,000원

필자가 여기까지 정리하고 다시 읽어보니 이 복잡한 장편소설이 꽤나 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인 도리스 레싱이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듯이 단순 간단한 이야기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이 작품을 직접 읽고 나면 필자가 이 글에서 ‘거짓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스탤지어’만 늘어놓았다고 느낄지 모른다. 어떤 독자는 이념과 정치 활동에 매혹될 것이고, 어떤 독자는 페미니스트의 적나라한 행위와 분석에 빠져들 것이다. 그 모든 속박의 근원인 무의식의 저변 심리분석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메타소설이라는 형식과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행위와 어법에 매료되었다. 이 소설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축적된 엄청난 에너지를 받아들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덮으면서 이십대의 순진한 ‘운동’의 열정을 느낀다. 새로운 더블의 탄생이다.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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