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얄타에서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겼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이승만이 제기한
얄타 밀약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유엔) 창립 총회가 열렸다. 50국 대표가 참가한 이 회의는 6월 26일 국제연합 헌장을 채택하고 폐막할 때까지 두 달 넘게 이어지며 전후 국제 질서의 재편 방향을 논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와 이승만은 전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해서 이 회의에 한국 대표단이 꼭 참석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승만은 자신을 포함한 대표단 9명 명단을 임정에 보고했고, 임정은 국무위원회의 추인을 받아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한국 대표단을 승인했다.
총회 시작을 한 달 앞두고 이승만은 총회를 주관하는 미국 국무부에 참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국무부는 “1945년 3월 1일까지 유엔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초청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한국 대표단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 등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나라들도 초청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가를 허용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총회 사무국은 “한국에는 어떠한 승인받은 정부도 없다”는 이유로 끝내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초순 이승만은 INS통신사 기자이자 이승만 후원 단체인 한미협회 이사 윌리엄스의 소개로 샌프란시스코 모리스호텔에서 고브로우를 만났다.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고 미국으로 귀화한 고브로우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었다. 고브로우는 이승만에게 루스벨트가 그해 2월 얄타회담에서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로 소련에 한국을 넘겨주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승만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미국에 대한 ‘의심’을 사실로 확인해주는 정보였다.
40년 전인 1905년 7월, 미국 전쟁부 장관 태프트는 일본 총리 가쓰라를 만나러 일본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하와이 한인 대표 윤병구와 면담한 태프트는 이승만과 윤병구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러고는 도쿄로 가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밀약 체결 나흘 후, 루스벨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승만과 윤병구를 30분간 만나주었고, 탄원서를 ‘정식 외교 통로’로 제출하면 러일전쟁 강화 회의 탁상에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우호적 면담 분위기에 고무된 서른 살 청년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루스벨트의 호의에 한껏 기대를 걸었다. 그때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4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폭로되었고, 오십 줄에 이른 이승만은 그제야 루스벨트와 태프트에 농락당한 것을 알고 분개했다.
고브로우를 만난 직후 이승만은 워싱턴 사무실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만일 1905년에 우리에게 고브로우가 있었다면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세계 지도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으나,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캐냈으므로, 세계에 양심이란 게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깨어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이승만은 유엔 창립 총회 취재 기자들을 상대로 ‘얄타 밀약’을 폭로하는 선전 활동에 나섰다. ‘시카고 트리뷴’(5월 8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5월 12일)에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전쟁이 끝난 뒤까지 한국을 소련의 세력 범위 안에 둘 것을 소련과 합의했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기초한 장문 기사가 실렸다. 이승만은 미국 상하원 외교 분과 위원장에게 항의 전보를 보냈고, 한 달 전 임기 중 사망한 루스벨트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냈다.
“한국에 관한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에서의 비밀 협정이 최근에 밝혀짐으로써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겁니다. 비밀 외교에 의해 한국이 희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밀약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다행히 얄타협정은 바로 이곳 유엔 창립 총회 도중에 밝혀졌습니다.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3000만 한국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사실무근’이라는 답장을 보내고, 별도의 공식 성명을 발표해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어긋나는 어떠한 비밀 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영국 하원에서 얄타 밀약에 대한 질의를 받은 처칠은 “3국 정상 사이에 많은 주제가 논의되었고, 약간의 일반적 이해가 성립되었지만 아무런 비밀 협약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소련 정부는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의 무책임하고 황당한 주장”이라고 논평했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공식 부인에도 이승만은 “밀약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3국 정상들이 한국에 관한 비밀 협정을 부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때부터 두 달쯤 지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사흘 후인 8월 9일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8월 10일 밤부터 11일 사이 워싱턴DC에서는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차관보를 위원으로 하는 ‘3부조정위원회(SWNCC)’가 개최되었다.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에 진주한 상태였지만, 미군은 1000km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은 적절한 선에서 소련과 타협해 소련이 한반도를 전부 점령하는 일만은 막으려 했다. 실무를 맡은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은 내셔널지오그래픽 극동 지도를 펼쳐 들고 30분 만에 북위 38도선으로 미소 점령의 경계선을 그었다. 소련은 단독으로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국이 제안한 한국 분할 점령안을 아무런 조건 없이 수락했다.
미국과 소련의 협의안은 9월 2일 미국과 일본 사이 항복 문서 조인식 때 ‘일반명령 제1호’라는 이름으로 포고되었다. 제1절 b항.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가라후토 및 쿠릴 열도 내에 있는 일본 부대는 소련군 극동사령관에게 항복한다.” 제1절 e항. “일본 본토 및 그 부속 도서,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류큐 제도 및 필리핀 제도의 일본 부대는 미군 태평양총사령관에게 항복한다.” 한국 분할과 관계된 부분을 제외하면,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승만이 주장한 얄타 밀약은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이승만은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이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북한 지역 점령을 허용한 결과라고 비난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49년 주한 미국 대사 무초,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에게 미국이 한국에 저지른 두 차례에 걸친 배신을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과거 40년 동안 미국은 한국을 2번 포기했다. 처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랬고, 두 번째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그랬다.”
<참고 문헌>
로버트 올리버, 황정일 역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출판부, 2002
박태균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8·15′ 군사 제96호, 2015
송남현 ‘해방 3년사 1′ 까치, 1985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정병준 외 ‘한국현대사 1′ 푸른역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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