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가 찍은 러시아어판 소설, 소련인들 표지 떼고 가져가

2023. 6. 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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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소설 『닥터 지바고』와 CIA
영화 ‘닥터 지바고’ 장면들. [중앙포토]
『닥터 지바고』는 소련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쓴 대(大) 서사이며, 주인공 닥터 지바고와 간호사 라라의 운명적 사랑을 그린 연정 문학이다. 『닥터 지바고』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고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58년 1월 CIA는 영국 정보당국으로부터 2통의 필름을 받는다. 필름을 현상해 보니 그 내용은 군사·외교 기밀이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 혁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된 『닥터 지바고』 원고였다. 출판금지에 실망한 파스테르나크가 이탈리아어로 출판하기 위해 이탈리아 펠트리넬리(Feltrinelli) 출판사에 원본을 넘겼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 정보기관이 원본 필름을 입수하여 CIA에 넘겨 준 것이다. “이 책은 인본사상을 담고 있어 소련에 배포하면 큰 효과를 있을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실제 무기보다 더 무서운 무기로 봐

영화 ‘닥터 지바고’ 장면들. [중앙포토]
CIA는 이 메모를 참고하여 원고를 검토한 결과 ‘모든 사람은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인간적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공산체제의 문제점을 알리는데 좋은 소재라고 보았다. 이는 당시 CIA내부 메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소설 『닥터 지바고』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문학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혁명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작품이 왜 그 자신의 나라에서, 그 자신의 언어로, 그 자신의 국민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하는지 강한 의문이 들게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고 공산주의가 문제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소련에게 이 소설은 실제 무기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본 CIA는 즉각 움직였다.

우선 네덜란드 무튼(Mouton) 출판사를 통해 러시아어판 1000부를 급히 출판했다. 그해 브뤼셀에서 개최중인 세계박람회를 보러 온 소련 관광객들에게 시범적으로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브뤼셀에 책을 가지고 온 CIA는 미국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도록 교황청 부스를 이용했다. 바티칸은 볼셰비키 혁명을 비판하는 책과 팸플릿을 전시할 수 있도록 부스 일부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소련 사람들이 책 표지를 떼고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어 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소련에서 출판이 금지된 만큼 귀국 때 들키지 않게 가지고 가 동료들과 돌려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CIA는 이 소설의 흥행 대박을 직감하고 바로 재판(再版)에 들어갔다. 초판보다 10배 많은 1만부를 찍어 7000부는 소련에 직접 은밀하게 배포하고. 2000부는 1959년 오스트리아 빈 청년축제에 배포했다. CIA의 개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유령출판사인 프랑스 몽디알르(mondial)가 출판한 것처럼 위장했다. 이후 공산권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책의 수요가 증가하자 CIA는 출판언어를 폴란드·독일·체코·헝가리·중국어로 확대하고, 책을 숨어서 읽을 수 있도록 초소형 포켓판으로도 만들어 배포했다. 포켓판은 현재 CIA박물관 전시돼 있다.

정보전쟁
CIA는 작가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데도 기여했다. 1958년 10월 노벨위원회는 이 소설이 작자가 살았던 시대를 장엄하게 표현한 대서사시로 러시아 소설의 전통을 잘 계승했다며 파스테르나크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려면 자국어로 작품이 출판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조건을 CIA가 해결해 주었기에 파스테르나크의 수상이 가능했다. 소련에서는 난리가 났다. 소련 정부는 그에게 ‘미국에 고용된 문학적 창녀’라고 비난하면서 노벨상 수상 포기를 강요했고, 소련 작가동맹은 ‘노벨상을 대가로 소련민중과 사회주의를 배신했다’며 그를 제명했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파스테르나크는 1960년 5월 30일 70세로 숨졌다. 이 때에도 CIA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회와 국가를 개조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공산당 세력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노래한 천재 작가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공격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공방도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해 『닥터 지바고』는 30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어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뿐만 아니다. 1965년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상을 5개나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8년 개봉 후 1987년, 1999년, 2012년 재개봉되는 인기를 누렸다. 소설은 1989년 미·소 정상이 냉전종식을 공식 선언한 후 비로소 소련에서도 정식 출간되었다. 이를 계기로 1990년 유네스코(UNESCO)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해 노래한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기린다며 1990년을 ‘파스테르나크의 해’로 선포했다. 이 소설을 통해 공산주의의 문제점과 모순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CIA의 정보전이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CIA, 문학작품 1000만 권 이상 재정 지원

몰래 읽을 수 있도록 만든 포켓용 초소형 『닥터 지바고』 책자. CIA의 개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프랑스의 유령 출판사가 출간한 것으로 위장했다. [사진 CIA 홈페이지]
CIA의 이념전쟁에 동원된 문학작품은 『닥터 지바고』뿐만 아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과 『1984』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만화영화로 제작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또한 『인카운터(Encounter)』, 『프뢰브(Preuves)』, 『데어모나트(Der Monat)』 등 공산주의의 모순을 고발하거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노래한 각종 책 1000만권 이상이 CIA의 재정지원 하에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이용한 CIA의 이념정보전은 문학의 순수성과 작가의 감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뉴욕타임스(NYT)가 냉전당시 CIA의 과도한 이념정보전에 대해 “존경과 사악, 명예와 무자비함이 혼동되어 있어 보기 흉하다”고 비판(1966년 4월 29일)한 것은 그 일환이다. 그러나 국가 또는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CIA의 닥터지바고 사업은 성공작이다. 문학작품을 이용하여 외부 위협세력의 팽창을 차단하는 것은 오히려 창의적이라 할 만하며 비용대비 효과도 크다. 전후 소련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미국을 공격했듯이, 미국도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발굴해 소련체제를 공격해야 했다. 냉전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소련체제를 공격할 수 있는 요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닥터 지바고』를 이념정보전에 활용하는 것이 반드시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 아서 술래진저 2세는, “CIA는 공산주의가 문화예술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막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CIA의 문화정보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고 응원했다.

전후 어수선한 시기에 공산주의의 이념 공세를 처음 경험한 미국은 두려움과 각오가 교차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문학의 순수성을 존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냉전이 무르익어가던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작성된 두리틀보고서(Doolittle Report)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두리틀 보고서는 “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지배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싸움의 규칙은 없다. 그러므로 미국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페어플레이’ 정신을 재고(再考)해야 한다.”며 비장하게 쓰고 있다. CIA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고, 이는 CIA에 부여된 시대적 책무라고 보았다. 그래서 CIA의 문화정보전은 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미술 등 문화예술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소련은, 역사가 짧은 미국의 문화예술 수준을 조롱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고, 특히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유럽 지식인을 자극하여 미국과 유럽을 이간시키는 소재로도 이용했다. CIA는 이를 그냥 둘 경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가치는 물론 짧은 미국의 역사가 정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정보가 추구하는 최상위 가치는 국가의 생존이다. 그래서 정보는 강한 국가주의를 띤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규범·윤리·비판은 부차적 문제로 밀려나기 십상이며, 궂은 일, 위험한 일, 비판받을 일을 가리지 않는다. 정보의 숙명이다.

최성규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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