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미국과 소련 다음이었다. 장족의 발전 이루려면 새로운 시장이 절실했다. 눈길이 30년 전 쫓겨난 중국을 향했다. 1971년 7월 15일, 미국은 ‘1972년 5월 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에 합의했다는 미·중 공동성명’을 발표 3분 전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 통보했다. 미국에 뒤통수를 맞은 사토는 중국에 방문 의사를 타진했다. 저우언라이의 반응은 가혹할 정도였다. “사토는 대표적인 전범 가족의 일원이다. 이런 사람이 이끄는 정부와 양국 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도 익살을 떨었다. “중·일관계에서 사토는 하릴없는 무작(無作)이다. 영작(榮作) 되기는 글렀다. 이름이 아깝다.”
다케이리 “그때 생각하면 식은땀”
사토는 잔여 임기 마치지 못하고 총리 관저를 뒤로했다. 근 8년간 총리직 유지하며 경제성장과 오키나와를 반환받은 사토의 후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전임 총리들과 달랐다. 명문집안이나 명문대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을 겨우 마치고 토목기사와 3류 잡지 기자하며 터득한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건 시작은 뒷구멍으로 해야 효과가 있다. 공직자들이 썩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절차 밟았다간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중국 접촉도 공식 라인은 배제시켰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중·일관계정상화 실현과 평화조약 체결, 대만문제 처리, 공동성명 발표 등 중국과 협의할 인물을 물색했다. “우리도 미국처럼 키신저 같은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자”는 여론은 귀에 담지 않았다. 외상 오히라에게 중임이 떨어졌다. 양국 지도자의 신임이 두텁고, 책임감 강하고 입 무거운 사람을 정부 요원이 아닌 야당이나 재야인사 쪽에서 찾았다.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스(竹入義勝)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다케이리는 1년 전 공명당 대표단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중·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5원칙을 제시해 저우언라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케이리가 중임을 수락하자 다나카가 신분을 주지시켰다. “나는 키신저 같은 특사를 파견할 생각은 없다. 개인 자격으로 가서 특사 행세를 해라. 속된 말로 가짜 특사다. 결렬될 경우 나는 특사를 파견한 일이 없다고 잡아떼겠다.” 1997년 봄, 나고야의 공원 찻집에서 다케이리가 25년 전을 회상했다. “1972년의 역사적 사건에 주선자로 참여한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나는 밀서 한 장 없는 가짜 특사였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 특사 신분 요구했지만 총리는 거절했다. 중국 측에 전달할 일본의 구상을 물어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담배 피우며 냉수만 들이켰다. 나는 공명당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당적을 버리고 가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1972년 7월 25일, 다케이리는 일행 2명과 함께 홍콩 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직항로가 없었다. 홍콩과 광저우(廣州)를 경유해 베이징에 가려면 3일이 걸렸다. 홍콩에 도착한 가짜 특사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를 받았다. 전용열차와 전용기로 도교 출발 14시간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와 랴오청즈는 인민대회당에서 3일간 10시간 이상 다케이리와 회담했다.
저우도 다나카 성격 등 조사 지시
저우와 랴오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다. 제도와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과거보다 미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요구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용어에는 민감했다. 저우언라이는 “다나카 내각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다케이리가 같은 의미라고 하자 발끈했다. “정통은 계승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 정권인 중화민국을 계승하지 않았다. 인민의 선택을 받은 합법적인 정부다. 합법의 반대어는 불법이다. 대만은 인민에게 버림받은 불법 정권이다. 불법정권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하기 바란다. 공명당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자민당의 법률 전문가들이 합법과 정통의 차이를 모를 리 없다.” 다케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국하면 다나카를 설득하겠다며 저우를 진정시켰다.
랴오청즈는 혁명기간 감옥을 7번 들락거렸다. 들어갈 때도 웃고 나올 때도 웃는, 역경에 처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낙천가였다. 별명도 많았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붙여준 ‘감옥전문가’를 제일 좋아했다. 이날도 발끈하는 저우언라이와 당황하는 다케이리 바라보며 끼득거리는 바람에 모두를 웃기고 분위기를 풀었다. 배상 등 중요문제도 단숨에 합의를 도출했다.
베이징을 떠난 다케이리는 홍콩의 호텔에서 3일간 두문불출했다. 다나카에게 보고할 비망록 작성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잠도 설쳤다. 귀국 이튿날 오히라와 함께 총리 관저로 갔다. 비망록 보여주며 설명도 곁들였다. 다나카는 흥분했다. “내가 직접 중국에 가겠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비서를 불렀다. “당장 중국인물 평전과 회고록을 수집해라.” 밤마다 중국 연구에 몰두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9월 25일 방중을 중국에 통보했다.
저우언라이도 다나카의 성격과 습관을 물론, 좋아하는 음식과 술, 노래까지 깡그리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실수도 잘하고 사과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심했다. 사진을 보니 앉는 자세가 쩍벌다리였다. 소파를 한 뼘 낮추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9월 말 도쿄의 집무실 온도도 체크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얼음물부터 마신다는 정보도 확인했다.
9월 25일 베이징에 도착한 다나카는 숙소의 공기가 쾌적해서 놀랐다. 복무원이 들고 온 얼음물을 두 잔 들이켰다. 소파도 일본의 집무실보다 편했다. 피로가 풀릴 즈음 저우언라이의 방문을 받았다. 방풍코트를 벗자 옆에서 거들었다. 다나카는 사진을 통해 저우의 오른팔이 불편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저우가 만류하자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이 방의 주인은 나다. 총리는 최고의 귀빈이다. 내가 거든 것이 당연하다.” 저우도 웃고 다나카도 웃었다. 회담이 순조로울 징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