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색깔 바꾼 마법사 류성희 영화미술감독…“정교한 디테일이 곧 전부다”
홍진기 창조인상 받은 류성희 영화미술감독
20년이 흐른 올해, 류 감독(55)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의 미술로 ‘아시아 필름 어워즈’를 수상했고, 또 ‘작은 아씨들’(2022)로 처음 도전한 TV 드라마 예술에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제14회 홍진기창조인상 문화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상의 이유는 시상식 영상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류 감독이 “한국영화계의 결정적인 사건 같은 인물”이며 “근본적으로 한국 영화미술을 바꿔놓았고, 영화미술을 대하는 투자자·제작사·감독, 모든 스태프·배우들의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평했다.
매체 상관 없이 스토리텔링 뒷받침
류 감독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세트·소품·의상 담당자가 따로 있었을 뿐 그들을 지휘하며 영화의 미장센과 시각적 ‘톤 앤 매너(tone & manner)’ 즉 일관된 특색과 분위기를 디자인하고 이끌어 가는 사람이 따로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영화미술감독, 혹은 류 감독이 더 선호하는 표현을 쓰면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일이다. 미술감독의 출현은 미술에 이해가 깊은 박찬욱·봉준호 같은 당시 젊은 영화감독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존 스태프의 반발도 심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며, 류 감독은 봉 감독의 ‘괴물’(2006)과 ‘마더’(2009), 박 감독의 ‘박쥐’(2009)를 비롯해서, 전쟁영화 ‘고지전’(2011)과 ‘국제시장’(2014), ‘암살’(2015) 등 2000년 이후 한국영화사의 주요 작품들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해냈다. 그러다 2016년 박 감독의 ‘아가씨’로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벌칸상(기술상)을 수상함으로써 드디어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류 감독은 올해 하반기 기대작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마스크걸’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고 있다. 중앙SUNDAY가 그가 이끄는 프로덕션 디자인 팀인 포도디자인스튜디오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류 감독 하면 주로 박찬욱 감독과의 협업인 탐미적이고 강렬한 미장센이 떠오르는데, 필모그라피를 보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마더’처럼 매우 현실적으로 남루한 미장센들도 만들어낸 것이 놀랍다.
A : “‘살인의 추억’을 할 때 무척 재미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도 남들처럼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는 게 꿈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디 서부영화를 찍게 됐는데, 사막에서 서부 세트를 열심히 짓다가 갑자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저 사람들의 문화와 배경을 연구하고 따르는 것 밖에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남들이) 안해본 것을 하는 데 내 시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살인의 추억’의 정교한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것이 가진 어떤 지역성, 국소적인 특성, 이런 것들이 결국은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한국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보였던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원칙이 ‘디테일이 곧 전부다’인데, 아주 작은 디테일도 잘 선택된 정교한 디테일은 또 다른 세계를 열게 된다. 그런 디테일을 한국의 지역성에 적용하면 촌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미국 영화 등에서 전혀 본 적 없는 참신한 것,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Q : 영화미술감독이란 개념이 없었다 보니 스태프의 반발도 많았을 것 같다. 특히 과거 영화판은 남성중심적이기로 유명했는데.
A : “영화감독님들은 처음부터 환영해 주었지만 스태프들은 반발이 정말 많았다. 오래 일해온 의상·분장 감독 같은 분들은 예전에는 영화감독과만 논의를 하면 됐는데, 논의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늘어났으니 그랬을 것이다. 특히 반발이 심했던 분들은 조명 감독들이었다. 영화미술과 조명은 긴밀히 연동이 돼 있어서,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조명을 사용할 것인지, 세트를 어떻게 설계하고 채광창을 어느 쪽으로 달 것인지에 미술감독이 다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조명감독들이 ‘당신이 뭔데 남의 파트에 관여하느냐’며 거부감을 표하곤 했다. 게다가 영화 스태프에 여자가 많지 않던 시절에 가뜩이나 거슬리는 미술감독이라는 존재가 여자니까 ‘여자 미술감독은 술이나 잘 따르면 돼’ 이런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 건 귀가 안 좋아서 안 들리는 척하며 넘겼다.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웃음) 요즘은 그런 면에서 영화 현장 여건이 많이 나아졌다. 후배들 중에 여자가 많고 다들 굉장히 잘한다.”
Q : 영화감독과 미술감독이 각자의 예술관으로 충돌하지는 않나.
A : “미국에서 배운 것이 그런 태도를 거세하는 것이었다. ‘너는 커뮤니케이터다. 모두 예술가들이지만 모여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는 너의 예술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배운다. 나도 처음에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내 의견에 맞추어 제작자와 감독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 태도에 대해 학교 선생님들, 이름난 영화의 미술감독이며 위대한 예술가인 그분들에게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지적과 가르침을 받았다.”
Q :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는가. 특히 ‘헤어질 결심’의 산 같기도 하고 파도 같기도 한 무늬의 벽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데 어느 명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가.
A : “예전에는 프랜시스 베이컨, 키리코, 마그리트 등의 명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책에서, 특히 동아시아 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틱낫한 스님이 한 말 ‘파도가 곧 바다인 것을 알게 될 때’가 특히 와 닿았다. (인간 개인은 파도로서 변화무쌍한 삶과 죽음을 겪지만 결국 다른 파도와 함께 근원적인 거대한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뜻) 불교에서 우주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의 우주는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우주도 다르다. 이런 세계관이 영화와 잘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예술가보다 ‘커뮤니케이터’
Q : 드라마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A : “영화는 프리-프로덕션 기간이 있기 때문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갖고 충분히 분석을 하고 준비한다면, 드라마는 일단 절반까지만 쓰여 있어도 많이 쓰여있는 것이다. OTT 오리지널인 경우에는 사전 제작이지만 방송 드라마의 경우에는 여전히 결론을 모르는 채 촬영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 만든 시각적 구조가 결말과 안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다. 영화와는 달리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 그래서 처음에 드라마는 하지 않으려 했다. ‘작은 아씨들’은 영화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으로 함께 일한 정서경 작가의 작품이기에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시청자의 반응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매력을 느끼게 됐다.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의견을 내고 또 그들끼리 (리뷰 영상, ‘짤’ 등의) 2차 생산물을 만들고 토론을 벌이는 게 영화보다 훨씬 빠르고 활발하다. 영화도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과의 소통이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프로덕션 디자인을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설렘이 있다. 누군가에게 가서 닿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매체를 별로 따지고 싶지 않다.”
Q : 뮤직비디오 같은 것도 할 생각이 있는가.
A : “기꺼이 하고 싶다. 하지만 제안이 안 들어온다. (웃음)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Q : 결국 중요한 것은 스토리인가.
A :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또 듣는 것을 즐겨 왔는데 결국 매체에 상관없이 스토리텔링이 본질이다. 나는 결국 스토리텔링을 돕는, 스토리텔링의 배경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영화와 영화관에 대한 애정이 커서 한때 젊은 친구들이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걸 슬퍼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매체는 중요하지 않다. K컬처 전반의 다양한 매체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뒷받침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 류성희 영화미술감독의 대표작
」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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