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석 76세 노인...악명높은 안기부 고문수사관이었다[그해 오늘]
고문 공소시효 끝나 처벌면제됨에도 끝까지 고문 부인
구속 후에도 "고문했지만 당시 특수 상황 봐달라" 뻔뻔
法 "피해자에 속죄 기회 있었는데 스스로 걷어차" 질타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20년 6월 24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525호 법정.
당시 76세의 남성 구모씨가 피고인석에 앉아있다. 구씨는 위증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이날은 선고공판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재판장인 변민선 부장판사가 법대에 앉은 후 판결 요지를 낭독한다. 그리고 판결 선고의 맨 마지막에 ‘주문’을 낭독한다.
“피고인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도주의 우려가 있으므로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법정구속이다. 피해자 측조차 예상치 못한 실형 선고와 법정구속이었다.
법원에 처방전까지 내며 실형과 법정구속을 피하려고 애를 썼던 구씨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이내 교도관들에 이끌려 법원 내 구치감에 유치됐고 얼마 후 교정본부 호송버스에 타고 구치소로 이동해 수감됐다.
평균적 70대 노인의 외형인 구씨의 정체는 군사정권 시절 ‘고문수사관’이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중정)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수사관을 역임했다. 그는 1975년 중정에 들어가 후신인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기 직전인 1998년 12월까지 근무했다.
구씨는 안기부 수사관으로 근무하던 1986년 12월 10일 고문 피해자인 고(故) 심진구씨(2014년 작고) 등을 안기부 남산 분실로 불법연행한 후 불법 구금한 후 다른 수사관들과 함께 심씨 등에게 고문을 자행한 당사자였다.
“온몸에서 피가 나고 살이 찢어져 심문실 바닥 피 범벅”
구씨를 포함해 6명의 수사관은 구금된 심씨를 35일 동안이나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성기를 책상에 위에 올려놓고 내려치고, 몽둥이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 35일 동안 구금돼 있는 동안 하루 두 시간 정도만 잠을 잤고 나머지 시간은 고문을 받았다는 것이 심씨의 증언이었다.
“내 몸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고인 피를 막대걸레로 닦아 내 손으로 짜야했다. 하도 맞다 보니까 나중에는 매가 몸에 닿으면 시원한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알몸이 돼 손과 발에 수갑이 묶인 채 6명의 고문수사요원들에게 물푸레나무와 야전침대자루로 목조르기, 머리, 가슴 등을 온몸을 밤새워 맞아 온몸에서 피가 나고 살이 찢어져 심문실 바닥에서 피가 범벅이 됐다.”
특히 심씨가 ‘구 계장’으로 기억하던 구씨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구 계장이라고 하는 덩치가 크고 얼굴이 넓적하고 눈이 가늘고 매서운 사람과 대머리가 까지고 키가 중간 정도의 약간 마른 편의 눈이 치켜 올라간 수사관이 가장 동물적 근성을 가지고 고문했다.” 실제 구씨는 안기부 근무 당시 90㎏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심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불법구금 20일 후인 12월 30일에야 집행됐고, 심씨는 16일 후인 1987년 1월 15일 검찰에 송치됐다. 고문은 멈췄지만 검찰에 송치된 후에도 안기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심씨가 수감돼 있던 구치소로 찾아와 위협을 가했고, 심씨는 검찰에서도 안기부 당시와 똑같이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씨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구치소로 찾아가 심씨에게 “운동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방송에 출연하라. 그러면 기소유예를 받을 수 있다”고 회유했다. 심씨는 결국 살기 위해 안기부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방송국 기자들과 안기부가 원하는 대로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기소유예는 없었다. 검찰은 인터뷰 며칠 후 심씨를 △국가보안법상 이적 목적 단체 구성 음모 △이적 목적 표현물 제작·복사·소지 △이적 목적 표현물 취득·소지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심씨가 진행한 인터뷰를 기소 이후 방송이 됐다.
법원도 1987년 4월 심씨의 혐의 전체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심씨와 검찰 모두 항소를 하지 않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심씨는 곧바로 석방됐다.
피해자 재심 재판 출석해 “때리지도 고문하지도 않았다” 위증
엄혹했던 시절이지만 심씨는 출소 직후부터 용기를 내 자신의 고문 피해 사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7년 6월 5일 함께 안기부 수사를 받았던 김영환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증언했다.
“저는 대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학생들보다 더 심한 고문을 안기부에서 자유의사를 박탈당할 정도로 받았습니다. 안기부에 1986년 12월 10일 구속되어 1987년 1월 30일까지 매일 매를 맞다시피 했습니다. 안기부에서 거의 한 달 동안 심한 고문을 받고 많은 허위진술을 한 채 검찰로 송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목소리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심씨는 이후 1999년 7월 한 월간지를 통해 또다시 자신의 고문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이후 2004년 4월 1일, 1986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던 정형근 전 의원, 이름을 알지 못했던 안기부 수사관들 등의 얼굴을 그려 독직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했고, 심씨의 항고와 재항고 모두 기각됐다.
심씨는 이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자신의 과거 유죄 판결에 대한 재심청구를 했고, 2010년 10월 재심이 개시됐다. 구씨는 2012년 4월 12일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했다. 구씨는 “심씨를 때리거나 고문한 사실이 없다”, “심씨가 시종일관 자백했고 다툼이 없었다”는 취지로 일관되게 위증을 했다.
구씨의 거짓진술에도 심씨에 대한 재심 1심 재판부는 2011년 11월 “안기부 수사관들의 불법구금·가혹행위가 인정된다”며 심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상소했지만 대법원은 2013년 7월 11일 심씨에 대한 무죄를 확정했다.
심씨와 가족들은 2014년 1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같은 해 11월 26일 “국가가 심씨와 가족에게 1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췌장암을 앓고 있던 심씨는 판결 3일 후인 11월 29일 생을 마감했다. 2심 법원은 배상액을 2억 4000만원으로 올렸고 대법원은 2016년 4월 판결을 확정했다.
“내가 피해자 잘 챙겨줘서 피해자가 따를 정도” 황당 주장
심씨 유족은 위증죄 공소시효 만료 23일 전인 2019년 3월 19일 구씨를 위증죄로 고소했다. 구씨는 검찰 수사에서도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검찰은 구씨를 위증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구씨는 법정에서도 끝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저 혼자서 소송서류 작성 업무난 하고 훈계 차원의 꿀밤을 줬을 뿐, 심씨를 심문하거나 고문하지 않았다. 다른 수사관들도 심씨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다. 설사 가혹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제가 목격한 바도 없다. 심씨 진술은 일관성이 없거나 객관적 사실에 반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내가 당시 심씨를 챙겨줬고, 심씨가 나를 따랐다. 심씨에게 금일봉을 주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쳤다.
재판부는 “심씨는 출소 이래 사망할 때까지 약 27년 간 일관되게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진술해 왔고, 진술 또한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2005년엔 안기부 수사관들의 몽타주를 그려내고 안기부 심문실 구조까지 자세히 적어 내기도 했다”며 “출소 직후부터 상당한 압박 속에서도 소극적이나마 가혹행위를 증언한 점에 비춰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구씨가 재심청구 사건 증인으로 나서 심씨를 고문하지 않았고, 다른 수사관들의 고문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은 기억에 반하는 허위의 진술을 한 것”이라고 결론 냈다.
위증죄로 기소된 사안이지만 구씨의 과거 고문이 반인륜범죄라는 점에 대해 질타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 소속 수사관이 국민을 상대로 한 불법구금, 고문 또는 가혹행위는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중대범죄이자 반인륜범죄임은 분명하고 엄하게 처벌함이 마땅하다”면서도 “고문 등은 공소시효 완성으로 더 이상 처벌할 수 없어, 위증죄의 양형기준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法 “유족들에게 진실 어린 마음으로 참회하라” 권고
또 구씨의 뻔뻔한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생전에 고문으로 인해 정상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고 가혹행위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으나 이미 사망해 더 이상 구씨로부터 진심 어린 참회나 사죄를 받을 기회조차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씨는 가혹행위를 저지른 이후 무려 34년간 자신의 저지른 범죄에 대해 심씨나 그 가족들에게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진술을 수시로 바꾸면서 법의 심판을 피하려고 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정의와 상식에 부합되게 엄하게 처벌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심씨 유족들에게 진실 어린 마음으로 참회하라”는 권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구씨는 1심 판결 이후에야 뒤늦게 고문 사실을 인정했다. 2심에서 공소사실 일체를 자백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2심에서 “고인이 된 심씨를 수사할 때도 북한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가혹행위가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서도 “고인에 대한 가혹행위가 정말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작금에 이르러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사망했지만 고인이 된 심씨와 그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전한다”며 “앞으로 남은 인생은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2020년 10월 21일 구씨 청구를 기각하고 1심 양형을 유지했다. 2심 재판부는 “구씨는 자신이 저지른 가혹행위 등 반인륜범죄에 대해 이미 공소시효 완성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형사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에게 속죄를 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심씨가 2014년 11월 사망해 심씨로부터 속죄를 받을 길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며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언급했지만 위증을 한 2012년 4월엔 그 같은 시대적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고 구씨의 선처 요청을 일축했다.
구씨는 2심 판결에도 불복해 상고했다. 대법원은 2020년 12월 구씨의 상고가 부적합하다고 보고 상고기각 결정했다. .
한광범 (toto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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