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애자 이야기서 발견한 ‘대등한 관계’의 가능성[신새벽의 문체 탐구]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하마노 지히로 지음·최진혁 옮김
연립서가|280쪽|2만원
편집자들은 ‘선생님’에게 공손하다. 저자 선생님에게 공손하게 발언을 끌어내고, 책임은 떠넘긴다. 상대의 학력을 노골적으로 중시한다. 이름 없는 작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하마노 지히로가 전하는 일본 출판계 이야기다.
하마노는 교토대학 인간·환경학연구과 대학원에서 한 동물성애 연구를 기초로 논픽션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를 썼다. 1977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자유기고가로 일하던 그는 38세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갔다. 학위가 있으면 자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동물성애란 동물과 감정적인 애착을 맺는 성애의 양상을 가리킨다. 인간이 억지로 동물과 성행위를 하는 ‘수간’과 구분된다. 모든 이성애자·동성애자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아니듯, 동물성애자라고 해서 반드시 동물에게 성관계를 원하지는 않는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세계 유일의 동물성애자 플랫폼인 제타(ZETA·‘관용과 계몽을 촉구하는 동물성애자 단체’) 설립 멤버 미하엘은 이렇게 반문한다. “꼭 섹스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저자는 희귀한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 2년에 걸쳐 네 달간 제타 회원들 집에 머물며 일상을 함께했다. 2016년 가을 첫 번째 현장 연구에서 만난 미하엘은 동행한 검은색 저먼 셰퍼드를 이렇게 소개한다. “케시예요, 내 아내.” 반년의 문헌 연구와 세 달간의 온라인 접촉을 거쳐 개를 아내로 소개하는 거구의 남자를 만난 것이다. 베를린 근교 시골로 미하엘의 차를 타고 가는데 휴대전화가 꺼진다. 차가운 날씨에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채팅에서 미하엘은 방어적이었다. 화상 연결로 본 그는 말수 자체가 적은 사람이었다. 자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가까이 보니 그는 인간보다 동물과 소통하는 데 능하다. ‘아내’인 케시와 수시로 “눈을 마주치고, 귀를 기울이며,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하마노가 직접 관찰한 미하엘과 케시는 “종종 서로를 지긋이 쳐다보는” 동등한 존재다.
하마노가 만난 22명 동물성애자 중 17명이 개를 성적 상대로 여겼다. 말은 8명, 개와 말 모두인 경우는 4명, 소를 파트너로 둔 사람이 1명이었다. 2003년 한 사회학 연구에서 동물성애자 114명 중 51%가 개, 37%가 말을 꼽았던 것과 비슷하다. 역사상 개와 말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오래 함께하면서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제타 회원들은 동물과의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 강조한다. 서로 대등한 존재로서 자신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다고. 제타가 지향하는 이러한 윤리는 ‘성인군자 납셨다’고 조롱을 사기도 한다.
동물성애자는 성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주인’인 인간은 개가 마운팅(올라타기)을 할 때 대개 민망해하며 피하고, 제지하거나 끝나기를 기다린다. 반면 동물성애자는 동물이 성적 욕구를 나타내면 그에 호응한다. 의사를 받아들여 성관계를 하거나, 자위 행위를 거들거나, 원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은 물론 쉽지 않다. 이 책의 호소력은 동물성애 연구와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나란히 놓는 글쓰기 방식에서 나온다. 하마노의 연구 동기는 친밀한 관계 내 폭행과 강간을 겪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섹스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개인적인 일화를 활용하는 전형적인 논픽션 글쓰기의 효과가 강력하다. 논픽션은 현실을 픽션으로 풀어내는 장르인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러브스토리를 썼기 때문이다.
동물성애자들이 들려주는 파트너 이야기, 그들의 성격과 선택, 저자를 대하는 태도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저자는 이해 불가능성을 운운하며 푸념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 역시 벌거벗었다”고 표현한다. “논픽션이라는 형태에서는 자신도 상대도 알몸이 되어 대화한 내용을 합칠 수가 있다”고 밝힌 글쓰기 전략이다.
2023년 4월 문학잡지 릿터는 이 책을 씨앗 삼아 ‘금기’라는 커버스토리를 걸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금기를 둘러싼 이야기들 안에 내가 지키고 싶은 게 있다”고 김세영 편집자는 지적한다. 사회 비주류인 동물성애자들이 지키려는 것은 바로 대등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하마노는 동물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삶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과의 관계가 대등했다고 느낀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끝까지 민감하게 의식되지만, 대등해지려는 노력이 마침내 ‘형태’가 있는 사랑을 거둔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탐구의 결실이다.
일방적인 관계는 한쪽을 부순다. 선생님-편집자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두가 모두의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상대의 대화를 합쳐서 저마다의 글을 써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알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르지만 말이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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