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본격 장마 앞두고 ‘침수 트라우마’ 겪는 반지하 거주민들

유경선·박용필 기자 2023. 6. 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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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전국적으로 동시 장마 시작
서울 반지하, 3곳 중 2곳은 물막이판 설치 못해
강남역 일대 맨홀 추락방지 설치도 5%에 그쳐
본격적인 장마를 앞둔 23일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한 상인이 폭우에 대비해 건물 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해보고 있다. 이 시장은 지난해 8월 집중호우로 점포 130여 곳의 절반에 가까운 50여 곳이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성동훈 기자

“비가 온다고 하면 겁부터 나요. 작년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올해 비가 많이 온다는데 물막이판을 아직까지 설치 못해서 너무 걱정이 돼요.”

오는 25일부터 전국적으로 장마가 동시에 시작될 것으로 예고되면서 반지하 거주민들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 집중수해로 인명피해까지 난 서울 동작구·관악구의 일대와 강남역 일대를 지난 22일 돌아봤지만 이날까지 물막이판 설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곳들이 부지기수였다.

강남역 대로변 일대 빗물받이 청소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으나 이면도로의 상황은 달랐다. 쓰레기가 넘쳤고 덮개가 씌워진 경우도 많아 위험천만해 보였다. 상인들과 반지하 주택 주민들은 “대책없이 또다시 올 여름을 견뎌야 하는데 별 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막이판조차 없는 반지하 주택들

동작구 상도동의 한 다가구 주택 반지하에 9년째 살고 있는 김모씨(69)의 집에도 지난해 8월 폭우 때 물이 들이닥쳤다. 집 출입문 바로 앞 배수관에서 현관 쪽으로 물이 콸콸 쏟아졌다. 김씨는 “죽는 줄 알았다. 물을 계속 퍼내고 며칠을 누워 있었다”고 했다. 혼자 사는 김씨는 “올 봄에 구청에서 물막이판 신청 여부를 물어보길래 해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해주겠다는 말을 못 들었어요.”

반지하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황모씨(72)는 동사무소에 물막이판 설치를 신청한 지 한 달이 다됐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고 했다. 황씨 사무실 바닥에는 지난해 침수 여파로 아직까지 물이 배어 올라온다. 그는 “물막이판 신청을 받는다는 것도 주위에서 알려줬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직원 김모씨(51)는 “오늘 동사무소에 언제쯤 설치되냐고 물어보니 직원이 ‘모른다’고만 한다”고 했다. 관악구 신사동에서 만난 반지하 거주민 A씨(71)도 “역류 방지 펌프는 알아서 달았는데 물막이판은 언제 해주겠단 건지 모르겠다”며 “이러다 또 물 얻어맞게 생겼다”고 혀를 찼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21일까지 물막이판 설치 대상인 반지하 주택 1만5290가구 중 설치가 완료된 곳은 32%인 4855가구로, 3곳 중 1곳에 불과하다. 관악구 관계자는 “작년부터 침수방지시설 설치를 계속 홍보했지만 최근 신청이 몰린 것 같다”며 “이달 말까지 올해 설치 목표의 63%, 8월 말까지 100%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물막이판 설치가 당장 속도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막이판 시공업체들은 이미 공정을 ‘완전 가동’하고 있다. 동작구·도봉구에서 물막이판을 시공하는 고모씨(65)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해도 하루 7~8군데를 설치한다”며 “지금 공장에 신청을 넣으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폭우로 빗물이 유입됐던 이수역을 포함한 13개 역사를 여름철 특별관리역사로 지정해 집중 관리한다고 23일 밝혔다. 또 폭우 시 즉각적인 대응을 위해 지하 역사 183역 704곳의 차수판을 출입구 근처로 이전 설치했다. 성동훈 기자

■여전히 위험한 빗물받이와 맨홀들

같은 시각 강남역을 중심으로 뻗은 차로와 대로변의 빗물받이 상태는 대체로 깨끗했다. 최근 관련 보도나 지적들이 잇따른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도로의 상황은 달랐다. 빗물받이 틈 사이를 담배꽁초·쓰레기가 막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덮개가 씌워진 곳도 많았다. 악취 등을 이유로 인근 상가에서 덮어놓은 것이다.

설령 빗물받이가 막히지 않는다고 해도 지난해처럼 시간당 100㎜가 넘는 비가 쏟아지면 지난해 같은 끔찍한 상황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강남역 일대는 인근의 논현역이나 역삼역보다 지대가 10m 이상 낮다. 그러나 이 일대 빗물터널의 용량은 시간당 95㎜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지하 40~50m에 대심도 빗물터널을 만들기로 했지만 빨라도 2028년에나 공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배수 용량을 넘어서는 물난리가 또다시 날 때 인도와 차도 곳곳에 있는 맨홀 뚜껑이 수압에 의해 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맨홀에 추락방지 그물망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현재 설치된 비율은 전체 맨홀 중 5% 이하다. 강남역 근처 한 건물 관계자는 “이달 초 자치구에서 동내 건물 관리자들을 불러 회의를 했는데, 제시한 대책은 빗물받이 청소를 좀 더 자주 해주고 배수펌프를 지원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라고 했다.

■물은 약자를 향할 것

결국 주변 상인들은 스스로 대비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침수 피해를 겪었던 한 대형건물의 관리인은 “지난해 기계실·전기실이 모두 물에 잠기면서 2주 가량 건물 전체의 전기와 물 공급이 중단됐다. 완전히 복구하는 데 4개월, 3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며 “입점 업체들이 영업 손실 배상 청구를 하지 않기로 해줘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몇 배의 돈이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건물은 지하 각층의 출입구와 기계실·전기실 출입구마다 수동 물막이판을 설치했다. 기계실·설비실 내부에는 자동 배수 장치와 경보 장치까지 달았다. 수천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건물 방재 관계자는 “우리가 막은 그 물은 결국 다른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며 “영세 소규모 건물 지하에 입점한 업체들이 주로 피해를 볼 것”이라고 했다.

영세업자들의 경우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건물주가 비용을 이유로 물막이판 등 방재시설물을 설치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 액세서리 매장의 업주는 “여름 내내 비가 온다는 소리도 있던 데 들 수 있는 보험이 있는지 한번 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반지하 주택에서 거주하는 김모씨(69)는 이 집에서 산 지 8년째에 지난해 처음 수해를 겪었다. 지난 22일 만난 김씨는 “수해가 너무 무서웠다”며 “구청에 물막이판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은 했는데 언제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경선 기자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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