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창작은 사치… 엄마이자 예술가였던 그녀들의 삶[북리뷰]

박세희 기자 2023. 6. 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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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줄리 필립스 지음│박재연 외 3인 옮김│돌고래
앨리스 닐·도리스 레싱 등
英美 여성예술가들 재조명
“아이가 자주 웃어 괴로워”
모성과 창조성 사이 ‘분투’
각기 다른 양육일화 꿰어내
1960년 미국 오리건주의 한 바닷가에서 딸을 안고 있는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모습. 르 귄은 자신의 글을 진정으로 지지해주고 그녀가 일할 수 있도록 양육을 분담하는 남편을 만났고, 작업과 육아를 분리해 창조 작업에 몰두했다. 돌고래 제공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방문을 닫고 의자에 앉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이들. 프루스트는 코르크로 모든 문틈을 막은 채 글을 썼고, 비트겐슈타인은 음식 냄새가 생각을 방해할까 봐 몇 주간 치즈 샌드위치만 먹었다고 한다. 자, 그럼 이 장면에 아이를 넣어보자.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배고프다고 칭얼댄다면 어떨까. 하나 더, 예술가들이 ‘엄마’라면. 창작에 몰입할 수 있을까. 아니, 창작이 가능하긴 할까.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는 모성과 창조성이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는지에 관해 탐구한 책이다. 전기의 형식을 빌려 출산과 양육, 모성을 중심으로 여성 예술가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인물화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화가 앨리스 닐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소설가 도리스 레싱,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 불린 수전 손태그, 저항적 글쓰기를 선보인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앤절라 카터 등 모성과 창조성 사이를 오가며 분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수상 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인 저자 줄리 필립스 역시 두 아이의 엄마다.

여성 예술가들의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모성과 창조성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느낀 감정은 비슷한 듯하다. 앨리스 닐은 70대에 이르러 “그림 그릴 권리가 없는 듯한 기분을 언제나 느꼈다”고 털어놨고 앨리스 워커는 “외롭게 빨고 있는 엄지손가락”을 “내 목구멍을 틀어막은 거대한 마개”라고 표현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아이가 울어서 괴로운 게 아니다. 아이가 너무 자주 웃어서 그렇다”고 했다.

책에 소개된 여성 예술가들의 삶 중 앨리스 닐의 가정사는 모성과 창조성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닐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고 자신과 딸을 놔둔 채 남편이 외국으로 도망가면서 그 고통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닐은 그림을 그리려 홀로 뉴욕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명성을 얻고 새로운 남편을 만나 아들 둘을 낳아 길렀다. 남편 쪽에서 길러진 딸이 성인이 된 후 엄마의 강연 행사에 참석해 맨 앞줄에 앉았지만 닐은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 경력을 위해 아이들을 버렸다는 것으로 유명한 도리스 레싱은 어땠을까. 짐바브웨에서 자란 그는 첫 남편과 두 아이를 낳았고 자녀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남편과 이혼했다. 런던으로 떠난 그녀는 소설, 시집 등을 내고 여러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고 두 번째 남편과 만나 셋째인 피터를 낳았다. 피터만은 잘 챙기고 싶었던 그녀는 피터가 67세가 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모든 여성 예술가들이 자녀와 쓰라린 관계를 맺는 건 아니다. 환상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어슐러 르 귄이 그 예다. 작가의 꿈을 지지해주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육아 분담을 당연하게 여긴 남편 찰스를 만나 그와 육아를 함께했다. 르 귄은 적어도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는 글을 쓸 수 있었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이 학교에 간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온전히 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인 앤절라 카터는 누구보다 의식적으로 엄마 되기를 선택했고 주위 친구들이 아이를 함께 돌봤다. 그 덕에 그녀는 “모성을 즐길 수 있었다”. “자식의 아름다움은 내가 최근에야 가담하게 된 음모”라고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모성과 창조성 사이의 만남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를 놓고 저자는 결론을 내놓는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진 않는다. 그저 이 책의 여성들이 어떻게 해냈는지, 이 여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이 책의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시간, 그리고 자기(self)였다”고 말이다.

‘그림자 밟기’의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는 “토마스 만에서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는 많은 남성 작가들이 그토록 갈망하며 묘사하던 마음 상태는 바로 엄마가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을 때의 그 거대한 바다 같은 일체감”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은 이를 이미 갖고 있다. 이 책에 담기지 못한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시간과 자기를 확보하고 끝끝내 살아남아 그것을 써냈다면, 혹은 그려냈다면 세계 예술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536쪽, 3만3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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