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원의 헬스노트] "태아 건강 해치는 산불 연기, 대응 매뉴얼부터 만들자"
재난 후 건강영향 역학조사 태부족…미국처럼 재난 때도 역학조사관 활용돼야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미국에는 산불이 났을 때 발생하는 연기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매뉴얼(Wildfire Smoke: A Guide for Public Health Officials)이 있다. '산불 연기: 공중 보건 공무원을 위한 안내서' 정도로 해석된다.
이 매뉴얼은 원래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기 자원 위원회(California Air Resources Board)와 공중보건부(California Department of Public Health)가 만든 것으로, 그동안 여러 차례의 업데이트를 거쳤다.
현재는 미국 정부 기관인 환경보호국과 국립해양대기청(NOAA), 국립공원관리청, 항공우주국(NASA), 질병관리통제센터(CDC), 지역 대기질 기관 등이 공동으로 공기의 질 정보를 공개하는 에어나우(AirNow) 사이트에 공개돼 있다. 산불 발생이 잦은 주 정부가 나서 초기 매뉴얼을 개발하고, 이후 국가기관으로 그 쓰임새가 커진 셈이다.
매뉴얼을 보면 산불 연기 노출을 최대한 피해야 할 취약층으로 호흡기질환자, 심혈관질환자, 어린이와 노인, 임신부 등이 적시돼 있다. 또 산불 연기 발생 시 주변 지역 사람들의 대응 요령과 실내 및 차량 내 공기 오염원 감소 방안, 마스크 선택과 착용 요령, 애완동물과 가축에 대한 보호 요령, 연기 농도에 따른 대피소 운영 및 의약품 공급 전략 등이 망라돼 있다.
매뉴얼은 이와 함께 산불로 인한 연기와 재에 노출되면 산불이 끝난 후에도 호흡기 자극이나 정서적, 신체적 스트레스 등으로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지적하고, 지속적인 주의를 당부했다.
우리나라에도 산불 연기 발생 시 대응 요령을 담은 이런 매뉴얼이 있을까? 아쉽게도 국내에는 산불 자체에 대한 국민행동요령은 있지만, 산불 연기에서 비롯될 수 있는 건강 위해성을 줄이기 위한 대응 매뉴얼은 어디에도 없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등으로 한국에서도 대형 산불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산불 연기 발생 시 건강 보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한국형 매뉴얼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최근에는 산불 연기에 의한 신생아 출생체중 감소 등의 위해성이 처음으로 확인된 상황이다.
성균관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김종헌 교수는 "대규모 연구 결과 산불 연기가 발생했던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의 체중이 줄었다는 건 (산불 연기의) 명확한 위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제라도 관련 정부 기관이 힘을 합쳐 산불 연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산불 연기의 건강 영향과 관련한 대응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건 앞으로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건강 영향은 어느 기관이 평가해야 하는지, 산불 연기 노출 시 대응 행동은 어느 기관이 주도해야 하는지 등이 불명확하다.
정부 기관으로만 보자면, 산림청과 소방청, 환경부, 국토부, 행안부, 질병청 등이 두루 관련돼 있지만, 정작 이 사안을 컨트롤할 헤드쿼터는 없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민건강과 관련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질병청이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질병청 역학조사관들이 감염병뿐만 아니라 산불과 같은 재난에도 투입돼 건강영향 평가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미국의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들은 홍수나 테풍, 산불 등의 손상 관련 역학조사를 모두 수행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재난, 재해와 관련 역학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역학조사관들이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데 있어 법적 근거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난 2020년 섬진강 홍수 때도 역학조사가 이뤄진 바 없으며, 작년 강남역 침수 사태에도 저지대 침수 가구에서 어떤 건강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역학조사가 전혀 이루어진 바 없다"면서 "각종 재해, 재난 시 역학조사관들의 활동 영역 확대를 위해서는 합당한 권한과 법적 근거가 필요한 만큼 재난 책임부처와 업무 조율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정부가 코로나19로 늘어난 전국의 역학조사관(621명)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10만명 이상의 시군구에만 배치했던 역학조사관을 10만명 미만 시군구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학조사관을 늘리는 것만큼 중요한 건 이들의 역할이 감염병에 한정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재난, 재해에 대한 역학조사도 국민 건강을 위해 역학조사관들에게 꼭 필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불 연기로 태아 출생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떤 물질이 주요 원인인지, 다른 질환은 없는지, 성장 과정에는 추가적인 문제가 없는지 등에 대한 역학연구가 꼭 이뤄져야 한다.
미국 질병관리통제센터 역학조사관(EIS)을 역임한 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 강대희 교수는 "이제는 역학조사관의 역할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메르스나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에는 감염병 역학조사에 투입하고, 엔데믹으로 전환됐을 때는 산불과 같은 재해, 재난 등에 대한 건강영향과 해외 역학조사 활동 등에 투입되는 방식이 고려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앞으로 산불과 같은 재해는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빈도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부터라도 이런 재해, 재난에 대한 역학조사를 늘리고, 국민 건강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한국형 매뉴얼을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이를 만들 컨트롤타워가 없다면 국무총리실이나 대통령실이 나서 각 부처의 업무 분장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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