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도서관, 공공성 성취의 바로미터

한겨레 2023. 6.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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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근대성과 공공성의 함수관계라는 관점에서 도서관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당대 조선이 이를 공공성을 갖는 대중 시설로 만들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나마 있던 사립 공공도서관은 선교사가 세운 것이었다.

해방 이후 공공 도서관은 일제 잔재에 발목을 잡혀 공공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독재정권이 추진한 근대성 이루기와 시민세력이 갈구한 공공성 확보하기의 대결이 펼쳐지면서 공공 도서관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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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인문산책]

한국 근대 도서관 100년의 여정
송승섭 지음 | 도연문고(2023)

개인적으로 근대성과 공공성의 함수관계라는 관점에서 도서관에 관심이 많다. 거칠게 말하면 근대성은 자본의 자기증식이라 이름 붙일 법하다. 근대가 품은 증식의 욕망은 마침내 에리직톤의 지경에 이를 거라 짐작할 정도였다. 이 거침없는 욕망의 전차는 공공성의 영역을 깔아뭉개 버렸다.

공공성이 강조되고 지켜져온 것은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결과이다. 모든 것을 시장에 내어주지 않으려는 저항이 없었다면 공공성은 남아나지 않았을 터다. 물론 공공성은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본의 자기증식 과정에서 저항계급을 체제로 포섭하려면 일정한 공공성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의 것이 있다는 믿음은 특정한 계급만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을 숨기는 가림막 역할을 톡톡히 한다.

스스로 근대를 이룬 국가는 저항이든 타협이든 공공성을 유지했다. 문제는 근대를 강요받은 국가의 공공성이다. 나름의 발전 논리에 따라 체제를 유지하던 뭇 국가는 근대성과 충돌하면서 양자택일의 길을 걸어야 했다. 서둘러 근대성을 성취하든, 아니면 식민지로 전락하든 말이다. 우리는 강요된 근대성을 이루지 못하면서 역사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국가 인민이 누린 공공성을 유예할 수밖에 없었다.

공공 도서관의 역사는 바로 이 참혹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인바, 송승섭의 <한국 근대 도서관 100년의 여정>은 그 역사를 따라 걷는 데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송승섭은 도서관의 공공성을 일러 “남녀노소 차별 없이 누구나 다양한 장서를 이용할 수 있으며, 그 비용은 국가가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상의 자유와 앎에 대한 접근의 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강요된 근대성에 적응하려는 우리 내부의 격렬한 운동이 있었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1906년 대한도서관 설립을 발기한바, 최초의 국립도서관 개관이 추진되었으나 한일합방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개화파가 자주, 자강, 구국 계몽운동 차원에서 도서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당대 조선이 이를 공공성을 갖는 대중 시설로 만들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나마 있던 사립 공공도서관은 선교사가 세운 것이었다. 스스로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와 일치한다. 1920년대의 도서관은 “조선인 대중을 사상적으로 지도하고 문화적 침탈을 보조하는 역할”이라는 일제의 목적에 충실했다. 폭압적 근대성 탓에 공공성이 자리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해방 이후 공공 도서관은 일제 잔재에 발목을 잡혀 공공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독재정권이 추진한 근대성 이루기와 시민세력이 갈구한 공공성 확보하기의 대결이 펼쳐지면서 공공 도서관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우리 근대성을 톺아보는 데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공공의 영역이 어떻게 세워지고 지켜지고 확장되어왔는가를 주목하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야만의 근대성이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성으로 변화하는 지표이어서다. 이제 근대 도서관 100년을 되돌아볼 적에 만족할 만한 공공성을 확보했을까? 난데없이 자유를 내세우는 목소리 탓에 공공성은 다시 위태로워지고 있다. 새로운 100년의 길이 열렸는데, 이제 여행은 끝나고 만 것일까?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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