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성매매·이민·조현병 속 어머니를 되살리다 [책&생각]
한국·미국에서 ‘쓸모없다’ 짓눌린 여성
요리·음식 통해 다시 따뜻하게 보듬는 작업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l 글항아리 l 2만2000원
제국주의 세력의 잇단 식민지배, ‘냉전’이란 허울 아래 벌어진 동족상잔과 분단…. 전쟁과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 했던 여성들에게 한국 사회는 ‘양공주’와 같은 멸칭으로 낙인을 찍었다. 쫓겨간 미국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것은 유색인, 소수 인종, 이민자란 이유로 쏟아진 차별과 배제였다.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잃고 한평생 오직 수치심만을 강요받은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쟁 같은 맛>(원저 2021년 출간)은 미국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사회학·인류학 교수인 그레이스 엠(M) 조(52)가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며 쓴 책이다. 지은이의 어머니 ‘군자’의 삶을 건조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태어나 해방과 미군정기를 겪었고, 한국전쟁 통엔 아버지와 오빠, 언니를 잃었다. 1960년대 기지촌에서 일하며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 뒤엔 미국인 선원을 만나 지은이를 낳고 결혼했다. 1976년께 남편을 따라 외국인 혐오가 극심했던 미국 워싱턴주 작은 마을에 이주해 살았고, 지은이가 열다섯 살 때 조현병이 발병했다.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살던 그는 2008년 심근경색으로 눈을 감았다. 이처럼 짤막한 서술에서도 여성, 피식민자, 전쟁 생존자, 성노동자, 디아스포라, 이민자, 소수 인종, 정신질환자 등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어서 일면만을 볼 수 없는 생애가 드러난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어머니의 미국 이민은 ‘추방’이었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미군 주둔으로 한국이 얻는 이익은 상당해서, 당국은 기지촌 성산업을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적극 홍보”했고, 젊은 여성이 생존을 위해 기지촌에서 일하는 것은 누군가 쉽게 말하듯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들에게 ‘양갈보’라는 낙인을 찍었고, “아버지들은 딸이 일해서 번 돈으로 가계 빚을 갚았으면서도 그 딸을 호적에서 파냈다.” 애초 이승만 정부는 혼혈 아동을 한국 국적자에서 배제하고 대통령 긴급명령(1954년)까지 내려 그들을 ‘국외 입양’시킨 바 있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옮겨온 미국은 그들에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버지의 고향 셔헤일리스에서 지은이 가족은 “이곳에 정착한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이민자들”이었다. ‘칭크’(Chink: 중국인의 멸칭), ‘잽’(Jap: 일본인의 멸칭)이라 불러대는 인종차별 속에서, “나는 한국인이야”라 항변하던 지은이의 대답은 점차 “나는 반(半)한국인이야”로, 결국 “우리 아빤 미국 사람이야”로 바뀐다. 끊임없는 차별과 배제 속에서 점차 “엄마를 사라지게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어머니는 불굴의 의지로 여기에 맞섰던 사람이었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미국 말과 미국 요리를 배우고, 가족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최저임금도 못 받고 야근 근무를” 했다. 나중에는 숲에 들어가 버섯과 블루베리를 채집하고 팔아, ‘블루베리 여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는 파티를 열어 한국 음식을 대접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한국 친족들의 미국 이주도 도왔다. 김치를 담가 마을에 온 한인들까지 살뜰히 거둬 먹였다. 이런 어머니가 지은이에게 바랐던 것은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지은이는 나중에서야 “내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지은이가 열다섯 살이던 1986년께부터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감시하고 해치려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고, 점차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등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가족들은 이를 방치했고 지은이는 대학 진학 등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당시 정신의학은 조현병이 단지 생물학적·유전적으로 발병한다고 보는 틀에 묶여 ‘사회적’ 원인을 보지 못했으며, 어머니가 공식적으로 조현병 진단을 받은 1990년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지은이는 오늘날 정신의학이 말하는 조현병 발병의 여섯 가지 사회적 위험 가운데 적어도 다섯 가지가 어머니에게 해당한다고 본다. 유년기에 겪은 사회적 역경,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신체적 혹은 성적 트라우마, 이민 경험, 소수 인종의 밀도 등. 흑인 페미니스트 퀴어 작가인 오드리 로드를 인용하자면, 어머니는 “결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다.
지은이는 대학 진학 뒤에야 어머니가 기지촌 여성으로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는 어머니의 ‘사회적’ 죽음의 원인을 학문적으로 추적하는 부채감으로 작용했다. “사회가 엄마에게 진 빚도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민자들에게 미국 사회가 진 빚,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제 몸과 성노동을 바쳤지만 ‘노고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단 한번도 듣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에게 한국 사회가 진 빚도” 있었다. 그럼에도 제국주의를 공통의 분모로 삼는 저 여러 가닥의 매듭들은 어머니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고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박탈했다. 연구는 첫 책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몰: 수치심, 비밀, 그리고 잊힌 전쟁>(2008)으로 결실을 맺었는데, 지은이는 어머니의 ‘사회적’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자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지은이가 그려내는 어머니의 ‘세 번째’ 모습에 있다. 은둔생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머니의 생존을 위해 여러가지 한국 요리를 하면서, 지은이는 먹는 것을 통해 어머니의 삶을 다시 톺아보게 된다. 이를 통해 한때 지은이의 학문적 작업에서 ‘유령’으로 떠올랐던 어머니는 지은이와 다시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기쁨을 안고 따뜻한 형상으로 머물게 된다. 미국에 이주한 여성들이 하나같이 “한국 음식의 물리적 부재로부터 온 결핍”을 호소한 데에서 보듯, 음식은 늘 음식 이상의 것, 이를테면 사랑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 번째 엄마는 내 30대를 함께 보낸 엄마로, 나를 당신의 요리사로서 받아들이고, 내게 할머니가 해주시곤 했던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준 분이다. 이 음식을 먹으며, 엄마는 천천히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먹던 음식을 요리하고 엄마의 어린 시절을 엿보면서, 나도 그 길을 찾았다.”
자신이 음식을 먹는 최초의 기억이자 엄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에 등장하는 김치, 어머니가 분유를 먹고 미군 보급품을 떠올리며 내뱉은 “전쟁 같은 맛”이란 말에 담긴 전쟁의 기억, 말년의 어머니에게 ‘40년 동안 이 맛을 못 봤다’며 큰 사랑을 받았던 생태찌개, 어머니에게 가장 사랑받은 미국 음식이자 기지촌 여성에게 “생존과 종속의 복합적 상징물”이었을 치즈버거 등.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먹을 것에 대한) 엄마의 결정이 주체성의 표현이자, 거대한 권력 구조에 대항하는 작은 반란 행위임을 깨달았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은이는 “기지촌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혼이 이 여성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이 소송에 대해, 지난해 대법원은 “국가의 기지촌 조성·관리·운영 행위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는 원고들의 인격권 내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해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는 취지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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