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라 불리던 기지촌 여성이 끊임없이 블루베리 파이를 구운 까닭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다음에 밥 한번 먹자."
한국인의 안부 인사에는 늘 '밥'에 대한 걱정이 담긴다. 식사는 했는지, 뭘 먹었는지 마음을 쏟고 다음에는 함께 밥을 먹자는 당부까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한국인이 '밥심'을 중요시하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배곯지 않는 일이 곧 안녕이었을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 같은 민족의 수난을 거치며, 우리 안엔 밥심 살피는 일이 문화적 유전자 안에 담기게 된 것이라고.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 그레이스 M. 조가 쓴 논픽션 '전쟁 같은 맛'에는 웬만한 레시피북보다 다채로운 음식과 식재료가 등장한다. 주로 자신의 어머니인 '군자'가 미국 사회에서 이민 온 뒤 만든 음식들이다. 음식을 둘러싼 모녀의 기억과 가족 에피소드로 구성된 개별적 미시사는 군자가 모든 생애에 걸쳐 겪은 민족의 거시사와 교차하며 디아스포라 연구의 탁월한 재료가 된다.
1941년생 한국 여성 군자. 인구공학적 속성을 건조하게 나열하면 여느 특별할 것 없는 중년 여성이 떠오른다. 이런 설명을 덧붙이면 어떨까.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생존자이며, 한국에 주둔한 미군부대 옆에 형성된 기지촌에서 성을 팔던 이른바 양공주라는 멸칭으로 불리다가, 혼혈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극심했던 한국 사회를 떠나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미국인 남편을 따라 1970년대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존재하지 않던 미국 워싱턴주 치헤일리스로 이주한 용감하고 생명력 있는 여성.
그렇게 미국 사회에 발 디딘 군자는 책 속에서 팔딱팔딱 살아 숨 쉰다. '전쟁 신부' '떠돌이 유령' 취급을 당하며 이민자에게 적대적인 작은 마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막강한 매력과 정치력, 그리고 생활력을 발휘하며 카멜레온처럼 새로운 세계에 적응한다. 블루베리와 버섯을 자연에서 채취해 마을 전체에 공급하고, 주부 잡지에 나온 조리법을 꼼꼼하게 연구해 동네 교직원들을 초청해 연말마다 칵테일파티를 연다. 미국 입맛에 익숙해지고 능숙하게 요리할 수 있게 되는 건 군자에게 미국인이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군자는 다른 이들의 허기를 살피는 데에도 살뜰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뿌리 뽑힌 채 덩그러니 낯선 나라로 오게 된 한국인 입양아들을 위해, 군자는 '김치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며 살가운 오지랖을 피운다. 새로운 한국 아이나 아내가 미국인의 가정으로 편입될 때마다 군자는 모국어로 "함 묵자"고 환영했다.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김치를 담가주었다.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회고한다.
인종차별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는 이민 1세대의 분투기 정도로 읽히던 책은, 활기 넘치던 군자에게서 낯선 행동이 관측되면서 반전된다. 별안간 이웃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음해하려 든다는 망상에 사로잡혔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행동이 지배당한다. "밖에 나가지 마, 요리 그만해, 그만 먹어, 그만 살아..."
위태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가운데 저자는 엄마의 생애에 걸친 큰 비밀 하나를 알게 된다. 바로 군자가 미국에 오기 전 한국 기지촌에서 매춘을 했다는 것. 그 순간부터 딸은 엄마의 정신을 산산조각 낸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이 책은 그 탐구 여정의 결과물이다.
책에는 맵고, 짜고, 달고, 고소한 갖가지 맛이 등장한다. 투명한 당면과 채 썬 채소, 온갖 고명이 알록달록하게 범벅된 잡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아시안 슈퍼마켓에서 사 온 배추와 고춧가루, 액젓, 새우젓으로 담근 김치. 한국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직접 바닷가에서 조개와 해초, 생선을 채집해 만든 쫄깃쫄깃한 미역무침과 고소한 빙어튀김. 크러스트와 블랙베리의 비율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향긋한 블랙베리 파이. 전후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미군 기지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 먹었을 치즈버거.
그러나 끝끝내 모든 미각을 압도하며 표제가 된 맛은, 전후 군자가 미군에게 받아먹었던 맹숭맹숭한 분유의 맛. 마시는 사람마다 설사로 고생하게 했던 불량한 음식. 신선한 식재료와 자극적인 향신료로 만든 훌륭한 음식으로 덮어보려 해도 전 생애에 걸친 트라우마처럼 혀에 아로새겨진 맛, 바로 '전쟁 같은 맛'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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