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일사분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2023. 6. 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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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모르니 뭘 잘못 표기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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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도 더 지난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아직도 대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안암동 로터리 근처에 ‘牧神의 午後’라는 커피전문점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간판에 한자를 쓰는 일은 인사동 같은 곳 밖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죠. 사실은 이곳은 원래 ‘보디가드’란 체인점 중의 하나로 커피 한 잔에 400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가격으로 고급 브랜드의 기치를 휘날리던 매우 호화로워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곳 근처에 있는 대학교엔 도저히 이런 곳을 용납할 수 없다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밤중에 막걸리를 마시고 단체로 응원가를 부르며 가게 유리창 앞에서 시위한 끝에,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얘기지만, 가게 주인은 체인점을 포기하고 간판을 바꾸고야 말았습니다. 아마 주인이 드뷔시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 얼마 후, 아마도 소개팅 장소를 찾는 듯한 세 명의 여학생이 그 앞을 두리번거리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 커피집의 간판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목신의 오후’가 어디 붙어있는 거야? 아 짱나.”

그러자 옆에 있던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도 무슨… ‘오후’ 아냐?”

그러자 처음의 학생이 이렇게 받는 것이었습니다.

“바보야, 여긴 ‘수신의 오후’잖아.”

비슷한 시기에 로터리 전봇대에 한 동아리가 신입생을 모집하는 공고문을 붙였습니다. 지금은 어느 동아리였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글씨로 씌어진 문구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상막한 대학 분위기를 확 바꿔 봅시다.’

그리고 그 몇 줄 위엔 이런 표현도 있었습니다. ‘큰맘먹고 대학에 들어왔는데 여기저기서 회방놓는 일들이 많죠?’

한 대학건물 1층 화장실에 총학생회에서 ‘낙서판’을 마련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 젊은 학생답게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내용들이 많더군요. 그중 이런 낙서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힘든 時伐이다… 이 時伐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저는 아주 잠깐, 도대체 ‘시벌’이 뭘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욕인가? 그러다 순간, 그 진의를 깨닫고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時代’를 쓰려다 잘못 쓴 것이겠죠.

…뭐, 이 얘기들도 다 오래 전 일입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횡행하는 총체적 국어 파괴 현상에 비하면 이런 한자사용의 오류 정도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제 인쇄물에서까지 이런 희한한 한자 사용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선 생략하겠습니다.

◆일사불란(一絲不亂)

‘한 가닥 실도 흐트러져 있지 않다’는 뜻으로 질서가 정연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TV 자막과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많은 경우 ‘일사분란’이란 정체불명의 단어를 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분란(紛亂)’이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다는 뜻입니다. ‘일사분란’은 ‘일사불란’과 발음이 같을 뿐 뜻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전격(電擊)

‘그룹 XX 전격 해체 선언’이라든가 ‘김모씨 더불어민주당 전격 탈퇴’와 같이 상당히 충격적인 일에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원을 따지지 않고 형태상으로만 본다면 전기충격(電氣衝擊)의 준말 또는 ‘전격적’에서 ‘적’이 생략된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전에는 ‘전격적’이란 말에 대해 “(번개가 들이치듯이) 갑자기 민첩하게 행동하거나 결단해 버리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갑자기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은 일에 대해 ‘전격적’이란 말을 남발합니다. 때로는 ‘완전히’라는 말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예도 종종 보입니다. 이미 사실상 별거상태에 들어간 줄을 모두가 다 아는 연예인 부부에 대해서 “전격 이혼선언”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아마도 전격(電擊)을 ‘전격(全格)’쯤으로 이해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후자의 경우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필경(畢竟)

이 말은 ‘마침내’ ‘결국에는’ 등으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필경 그리 되고야 말았도다!”라는 식의 한탄조에 잘 어울리죠. 그런데… 이 또한 ‘필시(必是)’라는 말의 동의어로 이해한 모양인지 ‘반드시’ ‘필연적으로’ ‘아마도’ 등의 뜻으로 사용하는 용례가 무척 많습니다. 나중에 눈에 띄면 한번 유심히 살펴보세요.

◆무대포 혹은 무데포, 무뎃뽀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처신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한자어 ‘무대포(無大砲? 武大砲?)’인 줄로 아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말은 일본어 무텟포(無鐵砲·むてっぽ)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철(鐵)이 없는 대포알, 즉 인간 대포알이란 뜻이니 막무가내형의 사람을 뜻한다고 하기도 하고, ‘철포(鐵砲)’가 총이란 뜻이니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간다는 무모한 일을 얘기한다고도 합니다. 혹자는 구두점 없이 표기하는 무점법(無點法)과 독음이 같아 여기서 유래됐다고도 합니다. 즉 ‘불분명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곧 ‘제멋대로 한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무텟포’를 ‘무대포’로 표기하는 것은 일본어 잔재의 한자음식 은폐·엄폐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재원(才媛)

한 영화주간지에서, 어떤 흑인 남자배우에 대해 소개하면서 대략 이렇게 썼더군요. “이 사람은 미국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며...” 아, 재원, 재원이라! ‘원(媛)’이라는 글자는 원래 이런 뜻입니다. (1)미인, 우아한 여자 (2)예쁘다, 아름답다 (3)궁녀(宮女). ‘재원’의 ‘원’은 (1)에 해당되겠지만, 단순히 ‘여자’ 또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즉 ‘재주있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남자보고 ‘재원’이라니? 아마도 ‘재원’을 ‘재원(才員)’ 정도의 표기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재원’의 반대말로 ‘재주있는 젊은 남자’는 ‘재자(才子)’라고 합니다. 김영사에서 임동석 교수 번역으로 나온 ‘당재자전(唐才子傳)’의 ‘재자’가 바로 이런 용례입니다. 요즘 이런 말은 별로 쓰이지 않지만요. 그런데 전 이 ‘재원’이란 말이 참 듣기 싫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여자가 제법이네?”하는 비하(卑下)가 깔려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좋은 데 시집가기 좋겠다”라는 뉘앙스가 있다면 좀 지나칠까요? 그렇다면 왜 ‘재자’라는 말은 쓰이지 않고 ‘재원’만 남았을까요.

◆유례(類例)

‘같거나 비슷한 예’를 말합니다. ‘유례없는 일’이라면 ‘그와 비슷한 전례가 없는 거의 초유의 일’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이것을 ‘유래’로 쓰는 예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매우 심각한 내용의 기사·보도자료나 대자보·전단에서 “이처럼 유래없는 일을 저지르다니…”운운하는 대목은 그 유례(類例)를 찾기 쉽습니다. ‘유래(由來)’라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모양인데,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유래를 알기가 힘듭니다.

◆양동(陽動)

대표적인 일본식 한자어 중의 하나입니다. ‘양동작전’이란 ‘본디의 목적과는 다른 움직임을 일부러 드러냄으로써 적의 주의를 그 쪽으로 쏠리게 하여 정세 판단을 그르치게 하려는 작전’을 말합니다. 즉 ‘속임수 움직임’ ‘페인트 모션’과 통하는 것이죠. 이 말, 제대로 쓰는 예를 보기가 힘듭니다. 다들 ‘양동(兩動)’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양쪽에서 협공하는 것을 ‘양동작전’을 썼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동(陽動)이라는 말 자체가 별로 좋은 한자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섭외(涉外)

‘건널 섭’자에 ‘바깥 외’자이니, ‘외부와 연락·교섭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말을 잘못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요? 오래 전 한 스포츠신문에서 이런 표현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개그맨 심모씨는 요즘 하도 바빠서 서배하기가 매우 힘들다.” 오타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만, 그 기사에 ‘서배’라는 표현이 3~4번쯤 나오더군요. 하긴, 요즘들어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서 ‘연예인(演藝人)’이라는 표기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개 ‘연애인(戀愛人?)’으로 씁니다.

◆막역(莫逆)

‘거스름이 없다’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 나하고 막역한 사이지”라는 말에 쓰입니다. 그런데 ‘막역’을 ‘막연’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하고 막연(漠然)한 사이야”라고 말입니다. ‘막연’이란 (1)아득함 (2)똑똑하지 못하고 어렴풋함이라는 뜻으로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4인방(四人幇)

여기서 방(幇)이란 주로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으로 결성된 결사(結社) 또는 집단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목장방(木匠幇)이라면 목수들로 조직된 단체를, 비방(匪幇)이라면 비적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방’이란 말은 청말(淸末) 민간에서 결성된 청방(靑幇)이나 홍방(紅幇) 같은 비밀결사 조직을 총칭하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이 글자는 지금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로 ‘무리’나 ‘패거리’라는 말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4인방’이라면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국정을 농락했던 강청·요문원·장춘교·왕홍문 4인을 비하(卑下)해서 ‘네 명의 패거리들’ 혹은 ‘네 명의 결사조직’이라고 지칭한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남발되는 용례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미녀스타 4인방 스크린 점령” “우리는 득점왕 3인방”… 이걸 최근 국립고전번역원장이 된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도 안되는 말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국정농단 3인방’ 같은 표현은 그나마 어의에 가깝게 쓴 말이라 하겠습니다.

◆생각

‘생각(生覺)’으로 표기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건 그냥 우리말 ‘생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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