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한국 연인을 담은 스위스 여성 거장의 드로잉

노형석 2023. 6. 2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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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내 그리웠을까.

반세기 전 미국 뉴욕에서 연인이 됐던 그때 그 한국 남자를 작가는 잊지 못했다.

그가 부처의 상처럼 그린 한 남자의 초상드로잉 두 점이 지금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장에 나왔다.

작가만이 간직한 한국 연인의 애틋한 기억을 유족들이 부러 설치를 요청한 초상 드로잉으로 전하면서 최근 서구에서 페미니즘 거장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특유의 기억 조형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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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부허 회고전
하이디 부허가 1957~58년 작업한 한 남자의 초상 드로잉. 미국 뉴욕에서 작업할 당시 연인으로 사귀었던 한국 외교관의 얼굴을 옮긴 것이다. 화폭 왼쪽 상단에 `方圓(방원) 朴民秀(박민수)‘란 한자 이름이 적혔다. 남자의 목 윤곽선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연인이 지어주었을 하이디의 한자 이름 `河耳智(하이지)’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못내 그리웠을까.

반세기 전 미국 뉴욕에서 연인이 됐던 그때 그 한국 남자를 작가는 잊지 못했다. 당시 자기 앞에서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 그의 용모를 그리고 그리워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망울, 코와 윗입술 사이 유난히 도드라진 인중과 콧방울의 윤곽, 반가상처럼 턱을 받쳐든 왼손…이렇게 특징 지워진 남자의 얼굴은 종이 화폭에 영원히 담겼다.

이 작가는 30년 전 세상을 떠난 스위스 여성미술거장 하이디 부허(1926~1993)다. 그가 부처의 상처럼 그린 한 남자의 초상드로잉 두 점이 지금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장에 나왔다. 이 드로잉들은 서로 다른 대륙에서 온 연인들의 만남에 얽힌 기억을 머금는다. 1957~58년 뉴욕에서 만나 뜨겁게 사랑했다가 헤어진 젊은 대한민국 외교관이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부허의 유족들은 전했다. 작가가 그를 응시하면서 연필로 옮긴 작은 초상 드로잉 그림 왼쪽 상단엔 ‘方圓(방원) 朴民秀(박민수)’란 한자 이름이 적혔다. 남자의 목 윤곽선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엔 하이디의 한자식 이름 ‘河耳智(하이지)’와 옮겨그린다는 뜻을 지닌 ‘寫(사)’자의 약자 ‘写(사)’자가 보인다. 모두 단단하고 정갈한 필체여서 한국 연인이 지어주고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인연을 담은 화폭 속 얼굴과 글자들이 관객들에게 상상의 갈래를 짓게 만든다.

전시 광경. 요양원의 입구 정문에 라텍스를 바른 뒤 마른 거죽을 뜯어내어 내건 설치작품 <작은 유리 입구>(1988)가 내걸려있다. 노형석 기자

센터에서 지난 3월말부터 열리고 있는 부허의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는 기억에 얽힌 두가지의 의미를 전해준다. 작가만이 간직한 한국 연인의 애틋한 기억을 유족들이 부러 설치를 요청한 초상 드로잉으로 전하면서 최근 서구에서 페미니즘 거장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특유의 기억 조형술을 보여준다. 취리히 공예학교에서 패션과 섬유예술을 공부했던 작가는 인간만이 지닌 권능인 기억을 뜯어서 형상화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기억은 과거를 체험하면서 부산물처럼 몸과 뇌리에 남는 그 무엇이며, 현재와 미래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기는 어렵다. 이런 지난한 작업을 작가는 몸과 물질로 풀어낸다. 라텍스를 바르고 천으로 덮은 뒤 뜯어내는 스키닝이란 작업을 통해 물리적 실체로 드러내거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조각옷을 입고 스스로 움직이는 조각물이 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발라서 피부처럼 변화한 라텍스 거죽을 직접 잡아서 뜯어내거나 자유롭게 유동하는 조각물이 되는 행위로서 몸을 작업에 개입시키고 그 흔적을 영상과 전시물로 발현시킨다. 전통 불상을 만들 때 건칠 기법을 쓰는 것처럼 라텍스 거죽으로 잠자리 같은 곤충의 변태과정에서 나타나는 허물 모양의 옷을 지어 입기도 한다. 곤충이나 갑각류가 성장하면서 겪는 허물 벗기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작가는 자신을 짓눌렀던 가부장적 공간들, 이를테면 아버지의 서재나 가족을 상담했던 정신과 진료실 공간들 벽에다 라텍스를 바른다. 말라서 피부처럼 점착하면 다시 거죽을 뜯으면서 널어놓고 내걸고 해원한다. 전시장에 내걸린 크고 작은 라텍스 거죽들을 떼어내어 작품으로 삼는 과정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씌워진 기억의 너울 혹은 허물을 벗는 유쾌한 도전으로 해석된다. 여기저기 널린 라텍스 거죽들이 칙칙하고 무거워보여도, 작업 영상들을 함께 보면서 전시장을 돌고 나면 왠지 개운하고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건 이런 맥락 때문일 것이다. 1층에는 부허의 작업에 화답하듯 국내 여성 소장작가 우한나 박보마 박론디의 색다른 물성 작업들을 모은 기획전 ‘즐겁게! 기쁘게!’가 차려져 또 다른 감상의 흥취를 안겨준다. 25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하이디 부허 회고전의 대표작중 하나인 <잠자리의 욕망>(1976). 잠자리가 변태를 거쳐 성체가 되는 과정의 허물벗기를 형상화한 라텍스 의상으로 제작할 당시 작가가 입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 미국 뉴욕 모마미술관 소장이 확정돼 전시 뒤 모마로 가게 된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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