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갈아넣어 만든 ‘마음의 양식’
포괄임금제 계약 많은 탓에
‘공짜’ 장시간 노동 당연시
폐쇄적 문화…갑질·괴롭힘
류호정 “근로감독 나서야”
“사장은 (책을 통해) 학생들에게 진정한 꿈과 행복을 찾아주자고 말하지만, 저희가 목격한 것은 이와는 정반대인 갑질과 괴롭힘, 각종 노동권 유린이었습니다.”
7년째 유명 교육출판사에서 일하는 정재순씨는 회사 대표의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했다. 대표는 마음에 안 드는 직원들의 메신저 대화를 무단으로 입수해 프린트한 뒤 전 직원에게 따라 읽게 하고, 가맹점에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등 갑질을 일삼았다고 했다. 정씨는 “대표가 노동청에서 10회 이상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았지만, 순간만 모면한 뒤 다시 불이익 조치 등 2차 가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했다.
출판업계 종사자들은 업계에 만연한 다단계 하도급 착취, 포괄임금제를 악용한 무급 장시간 노동, 직장 내 괴롭힘 등 문제 해결을 위해 고용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촉구했다.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와 류호정 정의당 의원실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출판업계 근로감독 요구 기자회견’을 열어 “출판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은 더는 뒤로 미룰 수 없는 문제”라며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필요하다면 특별근로감독으로라도 불법과 부조리를 엄단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출판산업 규모는 세계 10위권으로, 국내 콘텐츠 산업 중 사업체·종사자 규모와 매출액이 가장 크다. 서울국제도서전 등 대형 박람회도 꾸준히 열리고 있다.
‘책을 만든다’ ‘예술에 종사한다’는 낭만적 이미지 뒤에는 심각한 노동착취가 있다. 출판노동자들은 책 마감이 닥쳐오면 한 주에 52시간을 훌쩍 넘겨 일하지만, 대부분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맺은 탓에 장시간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근로기준법 대부분을 적용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70%에 달하고, ‘다단계 중간착취’가 가능한 외주제작도 30%가 넘는다. 폐쇄적인 문화 속에서 관행적인 갑질·괴롭힘도 심각하지만, 업계가 좁고 평판의 영향력이 큰 탓에 노동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다.
안명희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은 기자와 통화하며 “출판업계 경영자들은 경영방침 등에서 견제와 감시를 받아본 적이 없고, 노조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곳도 많은 등 노조혐오도 심각하다”며 “외부로 보이는 정의롭고 진보적인 이미지와 영세한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심각한 노동 문제들이 가려져 있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특정 업체를 넘어 업계 전반에 대한 근로감독이 필요하다고 했다. 출판노조협의회는 “출판산업에 만연한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 문화는 허용돼서는 안 되고, 포괄임금제로 대표되는 공짜노동 역시 출판산업을 피폐하게 할 뿐”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되지 못하는 외주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근로계약서·외주계약서 작성 회피를 엄단해야 한다고도 했다. 출판노조협의회는 무노조·외주 노동자들의 노동환경도 개선할 수 있도록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사용자단체와 산별교섭도 계획하고 있다.
류 의원은 “출판업계 근로감독을 통해 기초 고용질서를 바로잡고, 노동인권 보장을 위해 나설 것을 다시 한번 요구한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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