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반성문의 존재 이유]② ‘진지한 반성’ 노리고 ‘무늬만 반성’하는 피고인 양산

홍인석 기자 2023. 6. 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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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줄이려 겉으로만 ‘반성’하는 피고인들
‘진지한 반성’ 존폐 여부 논의 일기도
“피고인 반성 중” 적용한 판결 감소 추세
대법원 청사 전경./뉴스1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0년 3월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은 종로경찰서 앞으로 몰려든 취재진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그의 얼굴에선 반성의 기미나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달 뒤 조주빈의 태도는 180도 돌변했다. 갑자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그가 제출한 반성문은 112편, 호소문도 17편에 달한다.

조주빈이 갑자기 ‘반성’하게 된 이유는 대법원 양형기준 가운데 ‘진지한 반성’이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진지하게 반성할 경우, 감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 판결을 보면 반성하는 피고인은 범죄를 반복할 확률이 낮다고 판단해 법원이 감형을 해 주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진지한 반성’ 자체가 주관적인 판단 영역인 데다, 조주빈 사례처럼 감형을 노리고 영혼 없는 반성문을 쓰는 피고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진지한 반성이 양형기준에 포함돼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2021년 법원행정처 국정감사에서도 “피고인들이 감형을 노리고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실에 따르면 2019년 성범죄 사건 피고인 약 71%는 진지한 반성을 한다는 이유로 감형받았다. 살인·강도 역시 각각 55.5%, 70.4%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며 형량이 줄었다.

◇ ‘무늬뿐인 반성’에 비판 잇따르자 대법원, 기준 구체화

진지한 반성에 대한 비난이 잇따르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3월 진지한 반성 기준을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이나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 조사·판단하고 피고인이 범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로 구체화했다. 범선윤 양형위원회 운영지원단장은 “감형을 노린 대필 반성문 등 양형인자 남용 우려가 있어 인정 요건을 강화하는 정의 규정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범죄 피해자를 비롯해 일부 시민단체 등은 여전히 반성을 감경 요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피고인이 진지하게 반성하는지 피해자가 확인할 수 없는 데다, 감형을 위한 노림수로 보여주기식 반성을 하는 가해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판사는 “반성문 때문에 가해자의 형량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피해자들은 검찰 구형을 그대로 적용해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한다”면서 “성범죄 사건의 경우, 반성문과 탄원서가 동시에 제출되는 일도 많다”고 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최근엔 진지한 반성을 형량 감경 요인으로 적용하는 판결이 줄어드는 추세다. 20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반성을 이유로 감형받은 성범죄 사건 피고인 비율(1심 기준)은 2019년 71%에 달했던 반면, 2020년엔 31.6%, 2021년엔 27.3%로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관계자는 “반성을 신중하게 적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진지한 반성’ 기준 신설 후 성범죄뿐 아니라 46개 범죄군에서 반성이 적용된 판결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최근 대검찰청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대검에 보고된 주요 성범죄 판결문 91건을 분석한 결과, 성범죄 사건에서 법원이 기부나 반복적인 반성문 제출을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한 사례가 없다는 통계도 내놓았다. 이제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합의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 없이 단순히 반성문 반복 제출만으로는 형량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처벌 목적은 재범 방지, ‘진지한 반성’ 존재해야

최근엔 진지한 반성이 과연 양형 기준에 포함돼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대체로 진지한 반성’이 양형 기준에 포함돼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법 체계상 형사사건은 ‘엄벌주의’가 아니라 ‘교화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채은 법무법인 에이파트 변호사는“처벌 목적은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재범을 안 하도록 돕는 것”이라면서 “진지한 반성을 양형기준에서 제외하면 형사정책 원칙에 반한다”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박윤정 변호사는 “한번 범죄를 저질렀다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면 사회 자체를 유지하기 힘든 만큼 반성이라는 인자를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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