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료기기 프론티어]⑦ “의학물리학이 맞춤형 방사선 치료시대 열 것”
암환자 방사선 치료에 핵심 재료인 ‘볼러스’ 국내 최초 개발 성공
“웨어러블 선량계 비롯 모든 방사선 치료기의 국산화 목표”
의료기기산업이 ‘제2의 반도체’로 급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은 의료기기산업이 오는 2029년 888조원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제조업에 속하는 의료기기산업의 성장은 고용 창출, 투자 확대와 같은 낙수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의료기기산업 종사자는 지난해 기준 국내 보건 산업 종사자 중 가장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우리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산업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배경이다. 조선비즈는 국내 의료기기 산업 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인 기업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초기 암은 수술을 통해 암조직을 떼어낼 수 있지만, 병이 더 진행되면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에는 수술 단계에서 방사선 치료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한국원자력의학원이 발간한 방사선 치료 현황에 따르면 2019년 국내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는 총 8만7469명으로, 10년 전인 2009년 4만5571명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여러 암 가운데 유방암, 폐암치료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사용되는 방사선 치료기기나 핵심 재료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가격이 비싸고 고성능인 치료기기는 주머니 사정이 좋은 대학병원들이 도입해 쓰고 있다. 방사선 치료에 사용되는 재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내 의료 스타트업인 파프리카랩은 방사선 치료에 사용되는 치료기기와 재료를 모두 국산화하겠다며 출범한 기업이다. 기술의 국산화를 넘어 외산보다 치료 효과가 높고 가격은 낮춘 치료기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 김정인 파프리카랩 대표는 “현재 국내 시장을 장악한 해외 제품과 유사하지만 효능과 안전성을 높이고, 국내 병원에 저렴하게 공급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경북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의학물리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받고 2012년 서울대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지도교수인 우홍균 서울대병원 암진료부원장과 함께 암 정복을 위한 다양한 국책 과제 연구를 진행했다.
두 사람은 환자 맞춤형 선량계 연구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논문을 발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환자의 피폭을 막기 위한 웨어러블 선량계(방사선량 측정기구)를 개발했다. 콘택트렌즈처럼 생긴 이 안구 선량계는 방사선 치료나 진단 과정에서 전달된 방사선량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감응층의 색 변화로 선량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방사선 치료 과정에서 방사선량을 확인해 백내장, 시력감퇴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데 사용된다.
김 대표는 “종양에 방사선을 쏠 때 주변 정상 조직이 피폭될 수 있다”며 “웨어러블 선량계는 환자의 피폭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발됐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원래는 임상시험을 마친 후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대부분 수입산을 쓰다보니 기술이전을 받겠다는 기업을 찾지 못했다”며 “값도 싸고 성능이 더 뛰어난데도 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창업을 택했다”고 말했다.
파프리카랩은 내년 상반기 웨어러블 선량계 개발을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방사선 치료에 필요한 재료도 하나둘씩 국산화하고 있다. 최근 방사선 치료의 핵심 제품인 평판형 볼러스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식품의약품안전처부터 2등급 의료기기 제조 인증을 받았다. 볼러스는 고선량 방사선으로부터 피부와 정상 세포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보조 기기다. 유방암과 피부암처럼 피부와 가까운 암 조직에 가장 많이 쓰인다.
볼러스는 그동안 해외 수입에만 의존해왔다. 식약처도 의료기기의 허가를 심사할 때 인체에 미치는 위험성에 따라 3~4등급은 허가, 2등급은 인증, 1등급은 신고로 구분하고 있는데, 기존 수입 제품은 1등급으로 분류돼 안정성 보장이 어려웠다.
김 대표는 특수 실리콘 소재를 사용한 클린볼러스는 기존 수입 제품보다 밀착력이 높고, 굴곡진 부위에도 공기층 없이 밀착이 가능해 방사선 조사의 정확도를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울대병원, 중앙보훈병원, 연세대 원주기독병원 등에서 사용 중이다.
볼러스는 환자마다 다른 몸 형태에 맞게 밀착시키는 게 핵심이다. 볼러스에 열을 가해 맞춤형으로 만든 클린볼러스의 업그레이드 버전, ‘커스텀’ 볼러스도 연내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파프리카랩 사옥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기업명이 독특하다. 무슨 의미인가.
“특별한 의미는 없다. 평소 파프리카를 좋아하고, 울룩불룩하고 건강한 파프리카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헬스케어 기업인 만큼 조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기업명을 정한 후에 각 철자에 이니셜을 따서 기업 가치도 담았다. ‘개인 맞춤형의 정확한 방사선 치료(Personalized Adaptive Precise Radiotherapy)’이자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연구실(Innovative Comprehensive Assistant Lab)’이란 의미다.”
-창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창업할 계획은 아니었다. 지도교수이던 우 교수님과 국책 과제로 시작해 아예 제품을 개발했는데, 임상시험을 통해 환자들에게 직접 써보니 효과가 너무 좋았다. 이렇게 연구자들이 개발한 제품은 업체에 기술이전해서 상용화하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 기술을 받겠다는 곳이 없더라. 연구개발 기업은 거의 없고, 해외 장비를 수입해 판매하는 수입업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개발품이 사장될까 마음 졸이고 있을 때 우 교수님이 직접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주셨고, 2019년 12월 파프리카랩을 창업하게 됐다.”
-현재 선량계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국책 과제로 개발한 제품을 세계 최초 웨어러블 선량계로 고도화하고 있다. 현재 허진혁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팀과 함께 콘택트렌즈 형태로 안구에 착용할 수 있는 선량계를 만들고 있다. 안구에 착용하면 색의 변화를 통해 수정체에 조사되는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원리다. 내년 상반기 시제품을 내놓는 게 목표다.”
-선량계 외에 상용화 제품으로 볼러스를 택한 이유는 뭔가.
“현재 방사선 치료 기기나 재료의 99.9%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볼러스 제품은 기름이 많고, 미끌거리는 재질이어서 환자들에게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많았다. 유방암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각자 몸에 맞게 변형할 수 있고 부착했을 때 편안한 제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제품과 비교해서 가장 좋은 실리콘 재료를 선택해 개발했다. 투명한 재질이어서 치료 부위도 확인이 가능하고 셋업도 용이하다.”
-식약처로부터 받은 2등급 의료기기 제조인증은 어떤 의미인가
“1등급은 인체에 위험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식약처에 신고하는 수준이다. 2등급과는 차이가 크다. 클린볼러스는 피부감작 시험, 세포독성시험, 피부자극 시험 등 생물학적 안전성 시험까지 완료해 국내 최초로 2등급 인증 제품으로 허가받은 제품이다. 의료기기 제조 품질관리 기준(GMP) 인증도 받아 사옥에서 직접 생산하고 있다.”
-또 어떤 방사선 의료기기를 개발하고 있나.
“암 환자가 장기간 방사선 치료를 받기 전 컴퓨터단층(CT)촬영과 치료계획을 세우기 위해 몸에 검정색 잉크로 마킹(표시)을 한다. 이게 지워지면 안 돼서 환자들은 수개월간 씻지를 못한다. 여름에는 검정색 점들이 보일 수 있어서 외출도 꺼리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형광 타투를 개발했다. 자외선(UV)램프로 비춰야만 형광 라인이 보이는 원리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탈각돼 훨씬 편리하다. 현재 서울대병원, 강릉아산병원, 중앙보훈병원, 원주기독병원에 납품돼 사용되고 있다.”
–파프리카의 목표는 뭔가.
“처음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벤처)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우선 치료기나 재료를 더 좋은 국산 제품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세계 최초 타이틀보다 국산화를 먼저 실현하는 게 목표다.
개인적인 꿈은 의학물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거다. 의학물리학자는 환자를 직접 치료하지는 않지만, 방사선 치료에 고에너지, 고선량의 방사선이 사용되는 만큼 의학물리학자들이 선량을 측정해 각 환자에 맞는 처방 선량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30년 전부터 있던 직종인데 아직 법제화가 되지 않은 게 아쉽다. 더 많은 병원들이 의학물리학을 인정하고 도입해서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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