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만보다 지정학적으로 안정”… 日, 반도체 보고서대로 실행

박순찬 기자 2023. 6. 19. 03: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日 반도체의 재도전]
美·中 갈등을 부활 디딤돌로

“2030년 일본 반도체 기업 글로벌 점유율이 0%가 될 수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2021년 6월에 만든 ‘반도체 전략’ 문건 첫머리에 담긴 문장이다. 현재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의 기초가 된 문건이 뼈저린 반성과 처절한 위기의식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총 82페이지 문건엔 일본 반도체 몰락의 원인과 배경, 일본의 지정학적 기회, 향후 대책 등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이 내용들은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반도체 부활, 日 정치권이 주도

일본 경제산업성이 이런 문건을 만든 배경엔 정치권의 강력한 입김이 있었다. 문건 작성 한 달 전인 2021년 5월 자민당의 유력 의원 100명은 ‘자민당 반도체 전략 추진의원 연맹’을 만들며 ‘반도체 부활’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들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내에서 반도체 제조 기반이 소멸될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며 “일개 산업 정책이 아닌 경제 안보 관점에서 첨단 반도체 국내 공장 신·증설을 국가 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 미국·유럽 등 타국에 필적하는 예산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 속에서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는 정확한 인식과 주문이 일본 유력 정치인들에게서 먼저 나온 것이다. 문건 50페이지에는 “한국과 대만은 첨단 반도체 제조의 70%를 차지하고 있지만, 미·중 패권 대립 속에서 파운드리(위탁 생산) 산업의 지정학적 위기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일본의 안정적인 지정학적 잠재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중 갈등을 일본 반도체 부활의 디딤돌로 삼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이 문건의 핵심은 이 부분에 담겼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여당 실세 100명의 의원들은 문건에 담긴 대책을 차곡차곡 현실화하기 위해 입법부터 반도체 투자, 보조금 지급을 위한 예산 편성 등을 앞장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응책 첫째로 명시된 ‘첨단 반도체 공장 유치’는 문건 발표 4개월 만에 이뤄졌다. 대만 TSMC가 일본 소니와 함께 구마모토에 공동으로 반도체 공장을 세워 2024년 말부터 가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TSMC 투자액의 절반에 달하는 4760억엔(약 4조3000억원)의 예산 지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물 흐르듯 이뤄졌다. 이듬해 5월엔 반도체를 중요 물자로 지정하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이 가결됐고 “향후 10년간 민관이 10조엔의 추가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재원을 확충하자”는 반도체 연맹 의원들의 결의도 나왔다.

올 5월엔 미국 최대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도 일본에 최대 5000억엔을 투자해 첨단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메모리 업체인 삼성전자 역시 일본 보조금을 받아 반도체 시제품 생산 라인을 2025년 가동하기로 했다. 정부 문건에는 국립대인 도쿄대, 도호쿠대의 반도체 기술 수준까지 파악해 TSMC 같은 외국 민간 기업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까지 기술할 만큼 치밀하게 작성됐다.

◇지정학적 강점으로 부흥…한계 지적도

문건 발표 2년 만인 지난 6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전략 개정안’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일본 반도체 매출액을 15조엔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2021년 반도체 전략이 처음 나왔을 때 설정했던 13조엔보다 2조엔 늘어난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일본 정부와 정치권이 지난 2년간 주도한 반도체 부흥 실험의 성과에 자신감이 붙은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개정안에는 ‘2030년 점유율 0%’ 같은 표현도 사라졌다. 대신 TSMC가 구마모토에 공장을 신설하고, 일본 메모리 기업 기옥시아가 미에현에 신규 공장을 지으면서 경제 파급 효과가 9조2000억엔에 달한다는 성과가 담겼다.

다만 반도체 업계에선 일본 반도체가 단기간에 유의미한 위협이 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반도체 제조 실력이 40나노 수준인데, 3나노인 한국·대만을 넘어 2나노로 직행한다는 목표가 비현실적이란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보유한 데다 미국의 철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유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