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 이전에 청어 전쟁이 있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매년 6월 네덜란드의 항구도시 스헤베닝언(Scheveningen)에서는 ‘깃발의 날(Vlaggetjesdag)’이라는 축제가 열린다. 회귀성 어종인 청어가 돌아오는 때를 기념하는 ‘청어 축제’로 올해는 6월 17일에 시작된다.
바이킹이 지배하던 북해와 발트해 지역에 ‘어업 혁명’이 일어난다. 이유는 세가지 정도로 꼽힌다.
우선 1066년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 북해에 평화가 찾아온다. 바이킹의 바다가 평화의 바다가 된 것이다. 바이킹의 약탈이 사라지고 국가간 전쟁도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어업과 교역이 번성했다.
둘째, 평화가 지속되고 중세 카톨릭의 영향이 커지면서 생선 소비가 늘어났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많은 날을 ‘단식일’로 지정했는데 단식 기간에도 생선을 먹는 것은 허용했다. 또 성욕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육류보다 생선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렇게 생선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니 이 지역 사람들이 너도나도 어업에 뛰어들었다. 어업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당연히 늘어났다.
셋째, 북해와 발트해로 이어지는 지역의 수온 변화로 청어의 이동 경로가 바뀌었다. 13세기 발트해 근해의 뤼베크 어민들이 이 지역에 출몰한 거대한 청어떼를 발견하고 청어잡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청어 어업이 활기를 띄면서 북해와 발트해 지역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청어를 잡으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염장 작업이 필요하고 또 이를 유통시킬 유통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염장용 소금을 슬라브 지역에서 수입하다가 12세기부터 뤼베크의 상인들이 뤼네부르크 소금을 수입했다. 뤼베크 상인들이 소금을 독점하면서 뤼베크가 청어 어업의 중심지가 됐다. 발트해 인근 어부들이 청어를 잡아오면 뤼베크에서 염장을 했고, 영국, 플랑드르, 북프랑스의 상인들이 염장 청어를 사기 위해 뤼베크로 몰려들었다.
뤼베크는 발트해에서 20km, 함부르크에서 65km 떨어져 있고, 엘베강 하류에 위치해있어, 북해와 발트해는 물론, 라인강 상류 지역에서도 모두 접근하기 편한 곳이었다. 122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뤼베크를 ‘자유국제도시’로 선포하면서 청어 산업의 중심지로서 날개를 달아줬다. 니더작센과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뤼베크로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경제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것이 바로 ‘한자동맹’으로 불리는 북유럽 도시들의 경제공통체로 발트해와 북해에서 사실상 무역 독점권을 행사했다. 한자동맹의 중심에는 청어 산업이 존재했던 셈이다.
한자동맹 도시들은 청어산업 표준화를 통해 청어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해서 청어 패권을 이어갔다. 염장 청어를 담는 통 자체를 규격화해서 한 통에 최소 860마리를 담아야 했고 현장 감독관이 통 안에 든 청어의 품질을 검사한 뒤 검수 표시를 했다. 이렇게 검수 표시가 된 청어들만 유통됐다. 청어 통에는 생산지가 표시돼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생산지로 돌려보내서 이를 배상하게 했다.
두가지 이유로 청어 산업 주도권이 네덜란드로 넘어왔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청어 떼가 갑작스럽게 산란 장소와 회유 경로를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꾸었다. 네덜란드 근해에 청어 어장이 형성된 것이다. 역사의 경로를 인간이 주체적인 힘으로 바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역사에 더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더 많다.
둘째, 1350년경 빌럼 뵈켈스존(Willem Beukelszoon)이라는 네덜란드 젤란트 출신 어부가 개발한 새로운 청어 절임기술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뵈켈스존의 방식이라는 것이 한자동맹의 방식과 큰 차이가 났던 것은 아니다. 청어의 내장을 모두 빼내고 썪기 쉬운 부분은 모두 버렸다. 그런 다음 나머지 부분을 소금에 절여 통에 담았다. 한자동맹 방식과의 차이라고 해봐야 내장 제거를 좀더 세심하고 철저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시장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뵈켈스존 방식의 장점은 절임 기술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청어 산업의 프로세스를 바꾸었다는 데 있다. 한자동맹은 주로 덴마크나 스칸디나비아 어부들이 청어를 잡아오면 육지에서 염장해서 포장하는 방식이었던 것과 달리 뵈켈스존은 배안에서 일괄처리했다. 뵈켈스존의 방식에 따르면 하링바위스(haringbuis)라는 아래가 둥근 배가 먼 바다에 머물면서 청어를 잡으면 동시에 넓은 갑판 위에서 청어의 내장을 모두 딴 뒤 소금으로 염장했다. 이렇게 염장한 뒤 통에 포장하면 연락선이 이를 가져갔다. 말하자면 청어를 잡는 동시에 바로 염장을 하고 이를 육지로 보낼 수 있게 되어서 청어 어획량을 크게 늘일 수 있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청어잡이배는 2000척이 넘었다. 100톤이 넘는 대형어선들로 한척당 15명이상이 승선했다. 단순히 계산해도 3만명 정도가 청어 잡이에 나섰다는 얘기다. 이뿐 아니라 청어 가공처리, 어선의 생산 및 수리, 청어 유통 등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45만명이 넘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수치다. 당시 유럽 전체에서 한해 청어가 6만톤 정도 잡혔는데 3만2000톤이 네덜란드 어민들이 잡았고, 이를 유럽 각지역으로 수출했다. 유럽의 부가 네덜란드로 몰려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선, 청어 무역이 발전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제도도 네덜란드에서 발전했다. 1602년 세계 최초로 설립된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대표적이다.
주식회사의 기본 개념은 자금이 많이 들어가지만 리스크가 큰 사업을 사람들이 투자한 돈만큼만의 리스크를 감당하게 하고 그 만큼의 성과를 나눠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로 후추를 사러 암스테르담에서 배를 출항시킬 경우 그 배가 후추를 가득 싣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중간에 풍랑을 만나 난파될 수도 있다. 주식회사는 이와 같은 성과와 리스크를 함께 나눠갖게 하는 제도다.
청어 산업으로 네덜란드에 초기 자본축적이 이루어졌고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가 만들어지면서 네덜란드는 대항해시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청어 산업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초기 자본축적을 이룰 수 있었고, 금융업과 조선업, 해운업 같은 연관 산업의 성장을 달성했다. 다가오는 대항해시대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청어 산업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셈이다.
청어로 만든 ‘하링’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소울 푸드’가 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뿌리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청어 사랑에는 네덜란드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담겨 있는 것이다.
남성 평균 신장이 185cm에 이를 정도로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 불포화 지방과 비타민D가 풍부한 청어는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한 음식인 것이 분명하다.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을 싣고 왔기에 김희방의 무곡선(貿穀船·곡식을 매매하는 배)에 계산하여 주었다.”
부하들에게 청어를 잡게 만들어서 이를 수군의 먹거리로 활용하는 한편, 일부는 군량미로 교환하게 해 준 것이다. 중앙에서 군량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충무공은 병사들에게 둔전(屯田)을 일구게 해서 직접 식량을 생산하게 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니 청어를 잡아 보충하게 했다. 기름이 많은 청어는 조선 수군에게도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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