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이 中과 '당당히' 싸우는 사이 중국에 손 내미는 美와 英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서방의 대중국 전략이 중국을 배제하는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이 아닌 위험을 제거하는 '디리스킹'(De-risking)으로 옮겨갔다는 점을 공식 확인했다. 이후 중국과 서방의 접촉이 민관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주한 중국대사 발언을 두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비난하며 관계 악화를 자처하고 있는 한국과는 다른 행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21일(이하 현지시각) G7 회의 종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중국과 분리(디커플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제거(디리스킹)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다변화하려고 한다"며 '디리스킹'을 공식화했다.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겠다는 디커플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 시작됐고 바이든 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본격화됐다. 그러다 올해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중국에 방문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디커플링에 대한 반대 의사를 공식화하면서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G7 정상회의에서 디커플링 노선을 변경한 이후 미국은 중국과 접촉에 나서고 있다. 14일(현지시각) 미 국무부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오는 18~19일 중국 베이징에서 고위 관리들과 만나 미중 간 다양한 현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역시 블링컨 장관의 방문을 확인했다.
미국에 이어 영국 외무장관도 방중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 제임스 클리버리 영국 외무부 장관이 7월 중국 방문을 타진 중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주요 인사가 서방에 방문하는 일정도 계획돼 있다. 15일 중국 외교부는 리창 국무원 총리가 오는 18일부터 독일과 프랑스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리창 총리는 독일에서 제7차 정부 협상을 진행하고 프랑스에서는 글로벌 금융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할 계획이다.
왕원빈 외교부 대변인은 리창 총리의 독일 방문에 대해 이날 브리핑에서 "국제 정세가 불안정하고 인류 공동의 도전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은 독일 측과 관계를 더욱 심화하고 확장하며,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고 상호 이익을 유지하고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긍정적인 신호를 세계에 보낼 것"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그는 프랑스 방문에 대해서도 "중국과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책임대국으로서 다자주의를 수호하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진하여 세계적인 도전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중국은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당사자들과 협력하여 세계 발전을 보다 공정하고 지속 가능하게 촉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국과 서방의 접촉은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빌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는 14일 본인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중국 방문을 밝혔고 중국 관영매체 CCTV는 16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빌게이츠 공동창업자를 만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시 주석이 해외 주요 기업가를 만나는 것은 코로나 19 창궐 이후 최근 몇 년 만에 처음이다.
미중 갈등 속에서도 미국 기업가들은 중국 정부와 접촉해왔다. 지난 3월 팀 쿡 애플 CEO가 리창 국무원 총리를 만났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딩쉐샹 부총리와 만남을 가진 바 있다.
이렇듯 서방의 주요 국가들, 특히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가 대중국 접촉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이들의 중국 견제도 상당 부분 노선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간 갈등 양상을 보였던 미중 관계가 곧바로 전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블링컨 장관의 중국 방문 브리핑에서 "많은 결과물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로 중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조정관 역시 중국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외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언급대로 트럼프 정부 이후 시작된 미중 간 갈등이 블링컨 장관의 방문으로 봉합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블링컨 장관이 중국에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양국 간 접촉이 이뤄졌고 이를 통해 미국이 기존의 중국 배제와는 다른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상황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중국과 관계에 있어 '당당한 외교'를 이야기하며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에 대해 거친 반응을 내놓고 있다.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고 이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항의를 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외교적 항의에도 관례와 적절한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10년 전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 하는 것이 좋은 베팅이었던 적이 없다"며 싱하이밍 대사가 말했던 것과 유사한 발언을 했는데도 오히려 바이든 부통령을 감싸줬던 정부라면, 싱하이밍 대사의 발언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싱하이밍 대사와 중국에 대해 격한 비판을 쏟아냈다. 더군다나 외교부가 항의하는 것도 모자라 대통령이 선봉에 서서 중국을 비난하며 양국 관계를 더욱 풀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어버렸다.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도청사건, 일본의 강제동원 책임회피 및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만 당당한 외교를 하겠다는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데에는 현재의 국제 정세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간 관계에서 '편가르기'를 하는, 시대착오적이며 비외교적 관념이 중국에 대한 과도한 대응을 부르고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정서를 활용, 중국 때리기를 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지지를 높이겠다는 목표도 있어 보인다. 마치 북한을 때릴수록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정부가 중국을 공격함으로써 당장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중국 때리기와 디커플링도 미국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한, 즉 미국 내 정치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결국 미국도 국익 앞에서 중국과 디커플링을 포기하고 노선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아무리 국내 정치적으로 중국을 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도 국가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중국 때리기를 지속하며 국익보다는 정권의 안보와 이익을 우선할 것인지, 아니면 윤석열 대통령이 부르짖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뒤를 따라 중국과 만날 것인지, 선택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보인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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