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멱살 잡고 뺨 때리고 "도낏자루로 찍어버린다" 폭언까지…
저는 올해 30살의 청년입니다. 우선 제 이야기를 해보자면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후 반도체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월급은 들쑥날쑥했고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자주 아팠습니다. 어느 날 문득 더 늦기 전에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에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작정 인터넷에 '사무직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이라고 검색하니 컴퓨터활용능력, 전산회계 등... 그렇게 자격증이 많은 줄 난생처음 알았습니다. 얼마 뒤 회사를 관두고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다 보니 머리가 굳어서일까요? 쉽지 않더군요.
남들보다 두 배로 공부해야 했기에 한 달 중 1주일만 시급이 높은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활비와 학원비를 충당했습니다. 컴퓨터활용능력 1급, 전산회계 1급, 전산세무 2급, 네트워크 관리사, 포토샵, 일러스트 등 사무직 취업에 도움 된다는 자격증은 모두 땄습니다.
자격증들 덕분이었을까요? 1년 반 뒤, 드디어 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재고 관리 사원으로 취업했습니다. 함께 사는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이제 OO이가 몸 상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겠구나'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처음 출근하던 날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직원이 8명 남짓 되는 작은 회사였지만 동료들도 친절했고 재고 관리만 하다 보니 일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한 직원이 그만두면서 온라인 주문부터, 전화 주문까지 모두 도맡게 되었습니다. 야근으로 밤 10시를 훌쩍 넘기는 일이 잦았지만, 묵묵히 해냈습니다.
청년내일채움공제
청년(400만 원)-기업(400만 원)-정부(400만 원)가 공동으로 적립하여 청년의 목돈 마련과 중소기업 장기근속을 지원하는 제도
어느 날 돌변한 상무, 사무실이 더럽다며...
단순히 지적을 넘어서 욕설과 함께였습니다. 욕설을 퍼붓던 상무님은 저의 뺨을 때리고, 분을 못 이긴 듯 쇠망치를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너희들 책상들 봐, 이 XX들아. 정리 정돈 제대로 됐나. XX 놈들! 그냥 콱!"
겁에 질린 채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상무님도 경찰 앞에서 폭행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경찰에게 고소는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고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회사 대표
상무님이 대표님의 친형이기 때문일까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쨌든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었습니다. 상무님에게 사과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상무님은 저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며 폭언을 이어갔습니다.
인사위원회 결정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파면'
대표님은 사직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당장 잘라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서명하면 내년 2월까지라도 다니게 해 주겠다, 하지만 내년에 재계약할지 네가 하는 걸 봐서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옥상에 올라가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회사를 더 다니겠다는 의지에서 쓴 이 사직서가 족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상무님은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사직서를 들이밀며 네가 언제라도 그만두게 할 수 있다며 큰소리쳤습니다.
"지켜볼 거야 3개월 지켜보겠어. 알았어? 3개월 지켜봐서 개선이 안 되면 파면이야. 퇴직금도 없어, 이 새끼야."
상무님에게 폭언을 듣는 저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료들도 괴로워했습니다. 참지 말고 관두라고, 보는 내가 더 괴롭다며 함께 속상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견뎌보겠다고, 여기서 그만둘 수 없다고 동료들을 달랬습니다.
무자비한 폭행이 무서워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참고 견디는 사이, 또 폭행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업무 중이던 저에게 뜬금없이 상무님은 창고 청소를 시켰습니다. 무거운 페인트통과 먼지 쌓인 짐들로 가득한 창고였습니다. 페인트 통을 옮기던 중 큰 소리가 나자 상무님의 폭언이 시작됐습니다.
"똑바로 할 거야, 안 할 거야? 물건이나 집어던지고 하는데, XX, 새끼가. 얻다 대고 내 앞에서 이렇게 물건을 던져, 이 새끼야?"
그날은 저도 정말 참기 힘들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에 대한 욕도 서슴지 않던 상무님에게 처음으로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의 멱살을 잡고 휴대전화로 머리를 찍겠다며 위협했습니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나가자 상무님이 거기 서라며 뒤쫓아 왔습니다.
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건물의 화장실에 숨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상무님과 다시 마주칠까 봐 겁이 나 그날은 경찰차를 타고 버스 정류장에 갈 정도였습니다.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폭언과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회식을 하다 술에 취해 저를 때렸고, 사무실을 배회하다 제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네북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퇴사 후, 가해자의 처벌을 원했지만...
직원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상무님이 꼭 처벌받길 바랐습니다. 고용노동부와 노무사 등을 찾아다니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뒀던 녹취와 CCTV 등이 증거가 됐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은 인정되지만 가해자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부모님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장 쫓아가 상무님을 혼내주고 싶다고 하셨지만, 법적으로 먼저 처벌받게 하는 게 먼저라고 부모님을 다독여 드렸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법적 조치뿐이었습니다. 경찰서를 찾아가 폭력과 폭언으로 상무님을 고발했습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상무님이나 대표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상무님이 대표로 있던 회사는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폭행을 일삼는 자가 대표인 회사가 사회적 기업이라니 허무하기만 합니다.
오늘의 복면제보는 어렵게 정규직으로 취업했지만 회사 임원의 폭력과 폭언에 견디다 못해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청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 군의 사건을 노무 전문 강성신 변호사와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함께 더 자세히 짚어봤습니다.
강성신/변호사
"폭행에 폭언까지 김 군의 사건은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 폭행도 문제지만 폭언은 모욕, '죽여 버린다'는 표현은 협박과 강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개념 및 금지 명시(제76조의2)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그런데 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순 없었을까?
강성신/ 변호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2019년 7월 16일부터 시행됐지만, 이때만 해도 회사 구성원이 아닌 그 구성원의 가족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처벌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상무는 김 군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같은 회사 직원으로 등록돼 있진 않았습니다.
2021년 10월 14일부터 사용자의 친인척(배우자 및 4촌 이내 혈족, 인척)이 가해자일 경우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이 시행됐습니다. 김 군의 사건 같은 경우 2021년 2월부터 2022년 9월까지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가 2021년 4월까지만 남아있어 안타깝게도 가해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는 어렵습니다.
▶ 김 군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았으나 법 개정 전에 일어난 일이라 과태료 부과는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강성신/ 변호사
퇴사 후에도, 폭행 및 폭언이 있었던 날로부터 5년 이내에 고소가 가능합니다. 형법에 따라, 폭언의 경우 모욕죄가 적용되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합니다. 폭행의 경우 폭행죄가 적용되고 2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합니다.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가해자는 사이코패스일까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가해자는 사이코패스일까요?"
가해자를 상담하지 않고 진단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진단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한 가설 수준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녹취와 CCTV, 피해자의 증언으로 봤을 때 추측해 볼 수 있는 병명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자기애성 인격 장애입니다. 두 가지를 다 갖고 있을 수도 있고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특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파 같은 사물을 내리친다면 죄책감을 느끼진 않죠.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때리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맞는 사람이 '아프겠다. 화가 나겠다'라는 감정을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소파 같은 사물에는 감정이 없지만,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행동이더라도 소파와 타인에 대해서 우리는 다르게 느낍니다. 그러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 환자들은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소파를 때리거나, 사람을 때리거나 똑같이 느낍니다. 그래서 반사회성 인격 장애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더 쉽게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소파를 내려칠 수 있듯이요.
그리고 가해자가 "나 전과 8범이야."라고 자랑하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보통 이건 자랑이 아니라 숨기고 싶어 할 일인데, 자랑처럼 이야기한다는 건 의미 있게 볼 수 있습니다.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반사회성 인격 장애의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기애적인 특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자기가 남들과는 달리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상식 밖의 경험을 자랑거리로 여기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애성 인격 장애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많이 합니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 그걸 인정해 주지 않으면 크게 분노합니다.
Narcissistic Injury (자기애성 상처)
나르시시스트들은 비판받으면 심리적 상처를 입고 분노로 대응한다
'나는 너보다 우월하고 넌 나보다 열등한데 네가 감히 내 말을 안 들어?'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피해자의 마음입니다. 지옥 같았다고 말하면서도 2년이나 버틴 피해자가 이해 안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반복된 자극에 벗어날 힘조차 잃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직장 내 괴롭힘이 더 위험한 이유는 반복된 자극 속에서 피해자는 우울함과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
이런 쥐 실험이 있습니다. 작은 우리에 쥐를 가둬놓고 계속해서 전기 자극을 주면 처음엔 우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연이어 실패하면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피해자에게 상사의 폭력과 폭언은 자존심을 상당히 깎아내리는 반복된 자극이었을 겁니다. 피해자는 어렵게 취업한 회사라는 생각과 부모님의 기대 등에 더욱 그만두기 힘들었을 겁니다. 벗어나고 싶은 자극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다른 이유들로 인해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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