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다 더 넓은 행과 행 사이를 누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6. 16.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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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 │ 장성주 번역가
재미 좇다 영어·일본어·중국어 섭렵
항해사 되려다 번역의 길로
‘종이 동물원’으로 유영문학상 수상
“새로운 메시지와 상상 소개하고파”
장성주 번역가가 2일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소년은 무서운 속도로 책을 읽었다. 집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새로 사주는 책도 족족 읽어버렸다. 도서관은 너무 멀고 도서대여점은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집 근처 서점 주인과 거래를 했다. 책을 깨끗이 읽고 돌려주는 대신 책값을 할인해주는 걸로. 서점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장부가 생겼고, 어머니는 매달 책값을 치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숨겨놓은 책까지 발견해서 읽었다. 시드니 셀던의 <내일이 오면>이었다. 셀던은 로맨스와 서스펜스를 버무리는 데 특장을 가진 미국의 198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있다니!”

어렴풋이 알게 됐다. 학교와 어른들이 권하지 않는 것들 중에 훨씬 재밌는 게 많다는 걸. 공상과학(SF),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호러 등 이른바 ‘장르물’에 대한 ‘덕질’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책에 대한 몰두는 영화와 만화로도 이어졌다. 할리우드 영화를 본 뒤에는 영어로 된 원작을 찾아 읽고, 일본 만화를 보면 일본어로 된 자료들을 찾아봤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스스로 독해해야 했다. 그가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까지 섭렵하게 된 이유다.

고려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다. 5년 만에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그만뒀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배를 타기로 했다. 부산에서 국비 항해사 교육 과정의 면접을 봤다. 나이가 많은 탓인지 떨어졌다. 그때 출판사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배 탔어요?” “아니요.” “그럼 번역 한 권 해보면 어때요?”

번역가 장성주(45)의 첫 번역서 레이 브래드버리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의 주인공 남자는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다. 밤에 남자가 잠이 들면 이 문신들이 하나씩 살아나서 자신에게 얽힌 사연들을 들려준다. “그때 브래드버리의 책이 아니었다면 번역가로서 인생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지난 15년간 총 63권을 번역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부터 한국에 처음 소개된 켄 리우 작품까지 영한 번역뿐만 아니라 일본 만화계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 작품 등 일한 번역도 했다. 많은 책들이 출판 기획자이기도 한 그의 검토와 선택을 통해 번역돼 나왔다. 독자들은 그의 번역을 통해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마치 독자와 작품 사이에 ‘번역’이라는 작업이 없었던 것처럼. “내가 번역하고 있는 책이 내가 쓴 글도 아니고 내가 읽을 글도 아니기에 저자와 독자 사이에 나 자신을 최대한 지우면서 일을 한다”고 그는 말한다.

2019년 유영번역상 수상을 안겨준 <종이 동물원>은 중국계 미국인이 쓴 에스에프 판타지 소설집으로 근현대 동아시아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다 녹아져 있다. 심사위원회는 “역자는 동양 민담과 에스에프를 혼합해 역사와 기술의 문제를 다룬 원작의 서정성을 살리면서 마치 한국어로 쓰인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역했다”고 평했다. 장 번역가는 “동아시아 역사를 배우며 중국어를 공부하고, 나중에는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 책을 번역하고, 영미권의 에스에프 판타지 소설을 편집하고 번역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일과 경험,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종이 동물원>을 번역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장성주 번역가가 2일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그에게 번역이란 남들이 아직 모르는 재미를 먼저 발견하고 소개해주는 일이다. 편집자로, 출판 기획자로, 번역가로 살고 있는 지 올해로 딱 20년째.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 세상에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앞으로도 “판매가 보장되는 작가와 작품보다는 신인 작가나 우리에게 소개 되지 않은 작가를 소개하고 새로운 메시지 또는 새로운 상상의 공간을 여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뜻이 맞는 번역가들과 함께 동인지 형식으로 새로운 작품들의 흐름과 동향을 소개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15년 전 항해사가 됐다면 어땠겠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바다를 누비는 것도 좋았겠지만, 글의 행과 행 사이도 바다보다 더 넓다. 그 사이를 계속 돌아다닐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며 “독자들에게 ‘이 사람이 번역했으면 재미있는 책이겠네’ 하는 믿음을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종이 동물원

에스에프 및 판타지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작가인 켄 리우의 중단편 소설집이다. 중국계 미국인답게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와 역사가 녹아 있다. 장 번역가는 “에스에프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에스에프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수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켄 리우 지음, 황금가지(2018)

다크 타워 1∼6

젊은 시절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매료된 스티븐 킹이 이후 영화 <석양의 무법자>에서 영감을 얻어 서부를 무대로 쓴 판타지 장편소설이다. ‘총잡이’ 종족 최후의 생존자가 어둠의 탑을 찾기 위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치는 모험. 장 번역가는 “스티븐 킹 유니버스의 결정판”이라며 “올해 마지막 7부가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킹 지음, 황금가지(2009∼2019)

파워 오브 도그

미국에서 발표됐던 1960년대에는 외면받았지만 21세기에 각광받으며 영화로 제작돼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등 많은 상을 휩쓴 원작이다. 장 번역가는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간 황량한 평원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서늘하면서 스릴이 넘치는 퀴어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토머스 새비지 지음, 민음사(2021)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

1998년 책인데 20년이 지나 미국의 모든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석권했다. 백인 우월주의 대통령의 탄생과 노예제 부활 등을 예견하는 미국의 근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장 번역가는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인데 너무나 현실적”이라며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견하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라고 추천했다.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비채(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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