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홍교·벌교·단교… 다리 하나에 이름표는 3개
동네 주민들이 모여 60년마다 기념식을 하는 돌다리가 있다. 2018년 7번째 환갑 잔치상을 받았다고 한다. 후대에도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의미로 한글 비석까지 세웠다. 비림(碑林·비석이 모여 있는 곳)을 살펴보니 이미 6번째 환갑인 6주갑(六周甲) 기념비도 남아 있다. 환갑 기념비가 두 개씩이나 있다는 사실은 지역사회에서 이 다리의 위상이 어떤지를 물증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나이를 거꾸로 계산해 보았다. 대충 헤아려보니 430살쯤 된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홍교(虹橋·보물304호) 이야기다.
그 옛날 포구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냇물 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 벌교라는 지역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뗏목(筏·뗏목 벌)다리였을 것이다. 일설에는 갯벌에 있다고 하여 ‘뻘다리’라고 불렀던 데서 연유한다고도 했다. 어쨌거나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인지라 시골의 다리 역시 얼기설기 나무로 만들다 보니 홍수 또는 해일에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단교(斷橋)’라고 불렀다. 끊어진 다리, 다시 말하면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있다’고 여기면서 이름자를 붙인 것이다. 단순한 구전이 아니라 옛 지도(1872년 제작)에 ‘단교’라고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홍교가 이미 그때도 있었지만 홍교라 부르지 않고 굳이 단교라고 한 것도 참으로 의아하다. 거기에 더하여 오래전에 없어진 뗏목다리 역시 현재 고을 이름 ‘벌교읍’으로 건재하기만 하다.
홍교 인근 하천 언덕에는 다리와 관계된 비석이 즐비하다. 대충 봐도 예닐곱은 되겠다. 오래된 비석 가운데 두 기는 시작 부분이 ‘단교(斷橋)’로 되어 있다. ‘단교비명(斷橋碑銘)’은 머리 부분만 남아있고 몸체는 아예 없다. ‘단교중수비(斷橋重修碑)’는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비바람에 마멸되다시피 하고 또 표면까지 갈라지고 벗겨졌다. ‘없는 다리’에 어떤 사실을 기록해 두었을까?
나머지 비석은 ‘홍교(虹橋·무지개 다리)’라고 표기했다. ‘뗏목다리(벌교)’는 ‘없는 다리(단교)’가 되었지만 조선 영조 때(1729년) 그 자리에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당시 순천 조계산 선암사 주지 호암(護岩) 화상은 제자인 초안(楚安) 선사를 화주(化主·자금 담당), 습성(習性) 대사를 도감(都監·공사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초안 선사와 습성 대사는 선암사의 승선교(보물400호, 1713년 완공)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아마 선암사의 승선교 공사가 끝날 때만 애타게 기다리던 주민들이 자기들 고장에도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던 모양이다. 다리가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아 ‘단교’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동안의 사정도 읍소했다. 60년 주기로 다리를 위한 환갑잔치를 하는 것은 물론 살아있는 사람처럼 잘 모시겠다는 다짐도 아울러 전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두 다리의 건설 과정에 대한 기록은 벌교읍 홍교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 근처 바위 언덕 위 비석에 남겨 두었다.
‘토각구모(兎角龜毛·토끼 뿔 거북 털)’라고 했다. 이름은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을 비유할 때 선사들이 더러 쓰는 말이다. 발품을 팔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토끼 뿔 거북 털’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을 만났다. 왜냐하면 벌교와 단교는 이미 몇 백 년 전에 사라진 다리지만 아직도 그 두 이름이 버젓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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