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기후위기 그리고 ‘자유’

박지영 2023. 6. 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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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8월9일 폭우로 일가족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다세대주택을 찾아 박준희 관악구청장과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박지영 | 이슈팀 기자

각종 사건·사고를 쫓는 이슈팀 기자로 생활한 지 1년 반. 그동안 찾은 다양한 취재 현장들 가운데서도 산불, 폭우 같은 재난이 휩쓴 현장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집과 아수라장이 된 일터. 그 현장을 초점 잃은 눈으로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이재민들. 피해는 얼마나 입었는지, 정부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는지 등등 다급하게 기사를 쓸 땐 미처 느낄 수 없었던 이재민들의 무기력한 모습은 재난 현장을 빠져나온 뒤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곤 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여름.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올 폭우, 폭염에 ‘고생 좀 하겠구나’ 한숨 쉬며 일하던 중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발신자는 지난해 3월 경북 울진군 산불 현장에서 만났던 할머니였다. 당시 할머니가 살던 집은 밤사이 난 산불로 새까맣게 그을려 모두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난해 가을 울진을 다시 찾았을 땐 할머니는 원래 살던 집 바로 옆에 마련된 임시 조립주택에 머물고 계셨다.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와 이야기 나눈 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휴대폰 번호를 남겼는데, 아마도 그때 저장한 번호를 잘못 누르신 모양이었다.

‘잘 지내고 계시냐’ 안부를 묻자 할머니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집을 새로 짓긴 지어야 하는데… 막막하지.” 화마로 텅 비어버린 집터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되뇌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산불은 그렇게 어르신이 여든 평생 살던 곳을 떠나게 했다.

울진 할머니가 다시 떠오른 건 며칠 전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양말과 속옷을 파는 76살 상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서였다. 남성사계시장은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모두 잠겨 아수라장이 됐다. 10개월 뒤 다시 찾은 시장에는 침수 피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번에 비가 또 오면 정말로 가게 다 정리하고 도망가고 싶어.” 이날 만난 상인분 가게 한쪽엔 지난해 비에 젖어 곰팡이가 슨 속옷, 양말 등 더미가 쌓여 있었다. 올여름 장마가 지난 뒤에도 이 가게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는 어르신이 30년 넘게 지켜온 일터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재난을 겪은 이재민들은 정부 대책을 두고 “달라진 게 없다”고 토로했다. 반면 이들의 삶은 송두리째 변해 있었다.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또 누군가는 생계 수단을 잃어버렸다. 문제는 재난이 가져올 삶의 위기를 맞닥뜨려야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지난해 서울 강남 도심 건물들의 지하주차장이 폭우로 순식간에 잠기고, 도로 전체가 물바다가 돼 평범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재난이 휩쓴 자리엔 수치나 데이터로 표현할 수 없는 개개인의 고통과 상처가 겹겹이 쌓인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정부는 기후위기에 대한 선제 대응은 고사하고, ‘사후 약방문’ 식으로 내놓은 재난피해 복구대책에도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집중호우로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가족 3명이 숨진 뒤 정부는 ‘반지하 거주 가구 지원대책’을 발표했지만, 취약주택 거주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줄었다. 물막이판과 역류방지기를 동시에 설치한 가구도 서울시 전체 대상 가구의 22.3%에 그쳤다.

지난 12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낮아 미래세대가 많은 부담을 안게 되고, 이는 헌법상 평등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탄소중립기본법은 위헌’이라는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내기로 했다. 국가가 미래세대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하지 않아 기본권 보호 의무를 위반했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입법 조치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기후위기로 기성세대는 지금까지 일궈온 삶의 터전과 생계 수단을 빼앗기고, 미래세대는 다가올 기후재난에 마음껏 삶을 그릴 자유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자유’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 정부는 알기나 한 걸까.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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