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중국을 껌으로 보던 시절

이본영 2023. 6. 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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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1992년) 전 대학에서 중국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이제 많은 한국인이 미국과 호각을 다투는 중국에 당혹스러워한다.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거칠어지고 있다.

대체로 수세였던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을 제재한 것은 갈등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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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윤석열 대통령(당시 당선자)이 지난해 3월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마련된 당선자 사무실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로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축전을 전달받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본영|워싱턴 특파원

한-중 수교(1992년) 전 대학에서 중국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보통 사람은 아직 접근할 수 없던 ‘죽의 장막’ 너머를 다녀온 교수가 진기한 경험담을 풀어놨다.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란 얘기였다. 그러면서 혹시 갈 일이 있으면 껌 몇통만 챙기면 된다고 했다. 껌 한통 건네주니 그리 좋아할 수가 없더란 얘기였다. 화려했던 중국 문명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혀를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쯤 중국에 가본 한국인 중 비슷한 인상을 받은 이들이 꽤 될 것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우월감이 섞인 경험담을 전파했을 테다. 하물며 미국인들 눈에는 어땠을까. 한 미국인은 공영라디오 <엔피아르>(NPR) 인터뷰에서 1970년대 초반 베이징에서 머물 때 자동차를 10대 이상 보면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고 했다. 한국의 중년 이상은 단군 이래 이웃 대국에 가장 우월감을 느낀 세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많은 한국인이 미국과 호각을 다투는 중국에 당혹스러워한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고 말한 게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외교 사절의 발언으로 부적절하고, 상대국을 불쾌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8일 저녁 성북구 중국대사관저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불쾌함을 표출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상황의 배경에 있는 구조를 살피고 냉철한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거칠어지고 있다. 급성장한 국력에 바탕한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동시에 위기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대체로 수세였던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을 제재한 것은 갈등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표시다. 앞으로도 청나라와 일본이 번갈아 조선 조정을 압박하던 구한말에 비유하는 말이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런데 한국을 둘러싼 미·중의 밀고 당기기에서 정부는 과연 중심을 잡고 있나? 한국이 미국 편임은 유치원생도 안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편들고, 그 과정에서 포기하면 안 되는 게 무엇인가다. 미국의 국가안보실 도청 의혹에 대통령실은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없다”며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해 변론하는 해괴한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중국에서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부족분을 메우지 못하게 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싱 대사 발언에 대한 반응과 차이가 크다. 한국은 ‘이중 국격’을 가진 나라인가. 누가 하든 주권침해는 주권침해, 내정간섭은 내정간섭, 경제적 압박은 경제적 압박이다.

냉철하게 대응해야 할 국제정세 문제에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어 이런 모순이 더 커진다. 정부와 여당은 싱 대사가 야당 대표를 만나 한 말이라서 ‘때는 이때다’라고 판단한 것 같다. ‘친북 프레임’의 새 버전인 ‘친중 프레임’이다. 같은 사람도 내가 만나면 접견이고 다른 이가 만나면 알현이란다. 윤석열 대통령이 ‘싱 대사를 보면 청나라 위안스카이를 떠올린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총독처럼 군림하며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인물이다. 싱 대사가 위안스카이의 반의반에라도 해당하는 패악질을 했다면 한국인들은 당장 봉기해야 하지 않겠나. 과유불급이다.

흥분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 흥분을 공동체 전체의 이해와 상관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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