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집주인도 세입자도 속았다”···믿었던 ‘터줏대감’ 중개보조인의 배신
피해자 40~50여명...경찰 “곧 체포할 계획”
임차인 ‘유권대리’ 주장 땐 보증금 반환 가능
공인중개사의 명의를 빌려 사실상 공인중개사처럼 20년 넘게 일해온 중개보조인이 장기간 임차인의 보증금을 가로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원룸 오피스텔 임대차계약을 중개하면서 임차인과는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임대인에게는 월세로 계약했다고 속여 임차인의 보증금을 가로채는 전형적인 ‘이중계약’사기를 벌인 것이다. 경찰은 관련 임차인 피해자만 40~5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차인 피해자 A씨는 “우리집에서 통닭을 시키면 ‘이거 하나 먹어보고 가라’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며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 중개보조인과 십수년간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이번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고소장 접수과정에서 중개보조인의 실명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들에게 중개보조인은 ‘실장님’ 또는 ‘OOO(중개소 이름)’로 불렸다.
15일 경향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이중계약 피해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 7일이다.
오피스텔 임대인B씨는 매달 꼬박 들어오던 월세가 이번달 들어 입금되지 않자 OOO공인중개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잘 되던 중개보조인 김지수(58년생 추정·가명)는 그날따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중개사무소를 찾았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임대인은 결국 임차인을 직접 찾아 “왜 월세를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임차인에게 돌아온 답변은 “나는 월세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김씨의 중개로 오피스텔 임대차계약을 맺은 임차인들은 전부 전세계약자로, 월세를 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오피스텔을 보러온 임차인들과는 보증금 4000만~6000만원에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임대인들에게는 “월세로 계약했다”고 속여 매달 자신이 직접 월세를 지급해온 것이다. 즉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직접 월세를 내는 게 아니라 김지수가 임대인들에게 매달 월세를 보낸 것이다. 임차인들이 낸 전세보증금은 김씨의 계좌로 들어갔다.
믿었던 ‘중개보조인’···8일부터 돌연 잠적
조금만 의심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이같은 범죄가 가능했던 이유는 김씨가 20년 넘게 동네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경기 고양시 행신동 C오피스텔 인근 공인중개사는 “C오피스텔이 들어설 때부터 OOO공인중개사무소가 있었으니 김씨는 여기서만 20년 넘게 중개일을 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건물 1층에서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칼국수집 사장은 “세입자들이 ‘어디가 고장났다’하면 김지수가 관리사무소를 통해서 전부 수리해주고, 모든 관리를 도맡아 해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세입자들의 친인척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축의금 봉투에는 자신의 이름을 대신 ‘OOO부동산’이라고 적었다.
해당 오피스텔은 세대별로 면적 차이가 있으나 전용 23~30㎡ 안팎의 원룸형 오피스텔로, 임대인들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 월세수익을 목적으로 해당 오피스텔을 사들였다. 임대수익은 보증금 300~400만원에 월세 40만원 수준으로 저렴하다. 오피스텔은 1층 상가를 포함해 총 9층짜리 건물로 총 52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임대인들은 김지수가 20년 가까이 매달 빠지지 않고 월세를 보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그를 믿고 자신의 인감도장과 위임장을 맡겼다.
임차인들이 갖고 있는 임대차계약서를 살펴보면 임대인들의 도장과 인감도장이 찍혀 있다. 임대인들은 김씨로부터 가짜 월세계약서를 받았는지, 계약성사 여부를 구두로 통보받고 별도의 임대차계약서를 받지 않았는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17년부터 해당 오피스텔에 6년째 거주하고 있는 또다른 임차인 피해자 D씨는 “김지수는 계약 당시 ‘임대인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한국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인감도장과 위임장을 맡겼다’고 이야기했고, 실제 위임장도 보여줬었다”고 말했다. 이어 “보증금을 임대인이 아닌 김지수의 계좌로 넣으라고 할 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영업을 해온 분이고 임대인이 해외에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지난 8일부터 공인중개사무소가 문을 열지 않고 연락조차 되지 않자 김지수와 계약한 임차인이 단체 채팅방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규모가 작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D씨는 “현재 단채 채팅방에 모인 임차인 피해자만 40명이 넘는다”면서 “나같은 경우는 임대인이 해외에 체류 중이라고 속였는데 다른 분들을 보면 ‘임대인이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찬 거라 중개인 명의로 보증금을 보내주기를 원한다’ 등 속인 방식이 제각각”이라고 말했다.
김지수가 중개보조인이 아니라 공인중개사로 알고 계약을 체결한 임차인들도 있었다. 임차인들이 받은 전월세계약서상에는 공인중개사 육OO씨의 서명과 인감도장이 그대로 날인돼 있다. 인근에서 10년 넘게 영업해온 한 공인중개사는 “육OO씨가 아주 가끔 와서 김지수와 밥을 먹고 돌아가는 것을 봤었다”면서 “사실상 모든 영업은 김지수가 하고 육OO은 명의만 빌려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공인중개사법상 중개보조인은 매물 중개 및 계약서 작성을 할 권한이 없다. 공인중개사가 명의를 빌려주고 중개보조인에게 중개업무를 하게 하는 것 역시 불법이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행신역 인근에 총 5개의 큰 수익형 오피스텔 건물이 있는데 B오피스텔에서 피해자가 다수 나오기는 했지만 나머지 4개 오피스텔에도 피해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중개보조인이 임대인 위임장으로 계약 체결
현재 해당 공인중개사 사무실은 각종 사무집기들이 그대로 남은 채 문만 닫힌 상태다. 김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책상에는 뿔테안경까지 그대로 놓여있었다. 벽 한 켠에는 공인중개사 육OO의 이름과 사진이 있는 공인중개사증이 걸려 있었다. 피해자들은 지난주부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있다.
사건을 맡고 있는 경기고양경찰서 관계자는 “피해자 고소장 접수를 계속 진행 중이고 대략 임차인 피해자만 40~50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이 사건은 전형적인 이중계약 사기사건으로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했다. 경찰은 고소장 접수가 마무리되는대로 피해자 조사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법조계에서는 임차인들이 임대보증금을 돌려받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대인들이 중개보조인에게 위임장과 인감도장을 맡긴 이상 임차인들로서는 해당 중개보조인에게 법률대리를 할 권한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고, 실제 유효한 전월세계약서가 있기 때문이다.
임차인 중 일부의 사건을 대리 중인 유형빈 변호사(명안 법률사무소)는 “해당 사건의 경우 유권대리가 인정되기 때문에 임차인이 임대인을 상대로 전세보증금반환청구소송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 임차인들이 현재 보관 중인 위임장의 ‘위임범위’에는 ‘전세’라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그렇다면 김지수는 현재 어디에 있을까. 김씨와 마지막으로 통화가 됐다는 한 피해자는 “김지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아서 ‘김지수 어디에 있느냐’니 교통사고가 나서 중환자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재는 전혀 통화가 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취재결과 김씨는 현재 교통사고로 한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관계자는 “피의자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현재 중환자실에 있다”면서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우선 피해자 조사를 먼저 마무리하고, 체포영장을 받아 체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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