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외 금융자산 1000조…‘오일머니’ 사우디 제치고 세계 9위
지난해 우리나라는 상품 무역에서 20년 만에 가장 적은 흑자를 냈다. 반도체 무선통신 디스플레이 등 주력 품목 수출이 부진했던 탓이다. 고질적인 서비스 수지 적자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해외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 사상 최대(238억달러)를 기록한 덕분에 전체 경상수지는 약 300억달러 흑자를 낼 수 있었다.
우리 국민이 해외에 투자한 금융자산에서 금융부채를 뺀 순(純)대외금융자산이 작년 말 기준 7466억달러(약 1000조원)를 기록했다. 작년 우리나라 GDP(2162조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국가별 순대외금융자산 순위에서 한국은 2012년 133위에 그쳤지만 2021년 10위로 수직 상승했고, 작년엔 9위까지 올랐다. PGA(미국 프로골프) 투어를 사들일 정도로 ‘오일 머니’를 앞세워 왕성한 해외 투자를 하는 사우디를 10위로 밀어낸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상품 수출뿐만 아니라 자본 수출로도 국부(國富)를 늘려왔듯, 우리나라도 무역과 자본이 함께 돈을 벌어오는 본격적인 선진국형 ‘쌍발 엔진’ 경제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해외 자산보다 빚이 더 많은 빚쟁이 나라였다. 그러나 2014년을 기점으로 해외 빚보다 자산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휴대폰 공장을 가동하고, 현대·기아차가 인도·중국 등에 공장을 짓는 등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해외 직접 투자에 나섰다. 국민연금이 해외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한국은행 국외투자통계팀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저금리가 오래 지속되면서 개인투자자들도 고수익 해외 투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기 불황과 저금리가 본격화된 2000년대 일본에서 ‘와타나베 부인’들이 등장해 해외 투자를 늘린 것처럼, 한국에도 ‘김과장과 이부장’들이 해외 투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실제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해외 주식·채권을 사는 ‘증권투자’ 자산 규모가 기업들의 해외 공장 투자액보다 많아졌다. 애플·테슬라·엔비디아 같은 외국 주식에 투자한 서학 개미들의 종잣돈이 한국이 잠든 사이에도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다 주면서 국부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 한 해 우리나라가 주력 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로 벌어들인 수지(수출-수입)는 각각 544억달러와 387억달러. 해외에 뿌려진 투자 자산이 벌어들인 투자소득수지는 238억달러로 반도체의 44%, 자동차의 61%에 달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는 고금리와 중국의 저조한 성장세 때문에 수출 사정이 어렵지만, 해외 금융자산이 벌어들이는 배당과 이자 소득이 경상수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올 들어 1~4월 상품 수출입에 따른 수지는 약 93억달러 적자, 여행수지 등 서비스수지도 84억달러 적자다. 배당과 이자로 벌어들인 투자 소득이 나 홀로 137억달러 흑자다. 여기엔 삼성전자·현대차 해외 법인에서 국내로 보내온 배당금 등이 포함돼 있다. 덕분에 전체 경상수지가 54억달러 적자 수준에 그쳤다. 10년 전처럼 해외에 빚이 더 많았다면, 경상수지 적자는 200억달러에 육박했을 상황이다.
2009~2013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일본에 대해 ‘잃어버린 20년’, ‘세계 최대 부채국’이란 얘길 하지만, 사실 이건 일본 국내에 국한된 얘기일 뿐 해외 자산을 따지면 여전히 건재한 부자 나라”라며 “한국도 잠재성장률이 점차 낮아지고 고령화가 빨라질수록 국내에 투자해서 돈 벌기보다는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야 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중 갈등에 따른 산업별 흥망에서 보듯, 제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투자 자산 규모를 키워 ‘외풍’을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투자 자산은 대외 충격이 발생할 때 외화를 공급해주는 보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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