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맞대응 ‘나 혼자 외교’, 한국의 협상 공간 좁힌다
윤 대통령, 싱하이밍 발언 언급…차관급이 맡을 일에 나서
일본 과거사 문제도 외신 인터뷰 통해 사실상 ‘면죄부’ 줘
한·중 교류 행사 취소 등 관계 급랭…‘리스크 관리’ 시급
윤석열 대통령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최근 발언에 대해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정조준하면서 한·중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통령이 국장급 대사 발언에 직접 반응함으로써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외교 채널로 풀기 어려운 갈등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일본 과거사 문제부터 중국 대사 발언까지 모두 대통령의 ‘입’으로 정리하려는 ‘나 혼자 한다’식 대처는 한국의 외교 공간만 좁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싱 대사의 ‘베팅’ 발언을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지적하면서 싱 대사를 임오군란 때 내정간섭에 앞장선 청나라 위안스카이에 비유하는 세간의 평도 언급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 “중국 측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외교사절의 부적절한 언행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차관급에서 외교적으로 항의하고 마무리해온 관례를 벗어나 국가원수가 직접 문제를 제기한 것은 되레 악수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14일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서 외교라인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됐다”며 “중국이 이를 빌미로 더 거센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커 외교적 해결 가능성은 더 줄어들게 됐다”고 했다. 지난 8일 “중국 패배에 베팅한다면 잘못된 선택”이라는 싱 대사 발언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원고에서 나왔고 한국의 반발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외교 전문가는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이 매우 불쾌해하고 있다’며 감정적 발언을 함으로써 중국의 ‘전랑(늑대전사) 외교’라는 험악한 ‘진흙탕’으로 같이 빨려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중 갈등의 시발점은 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19일 공개된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는 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이슈”라며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고 했다. 대만 문제를 ‘핵심이익 중 핵심’으로 다루는 중국은 외교부 대변인이 윤 대통령 발언을 두고 ‘불용치훼’(말참견을 허용치 않겠다)라는 거친 언사로 대응했고, 양국이 상대국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며 관계가 얼어붙었다. 이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조건부 무기 지원 가능성도 시사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급속 냉각됐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정교한 외교가 절실한데 대통령의 말 외교만 도드라진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도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4월24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고 윤 대통령이 면죄부를 줬다. 특히 여론은 반성 없는 일본을 향한 비판이 우세했음에도 윤 대통령은 설득과 의견수렴을 외면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미래·청년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고, 싱 대사 발언 비난 때는 ‘국민’을 내세웠다.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중관계 분위기를 바꾸기는 더 어려워졌다.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중 학술행사나 문화교류 행사들은 줄줄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한·중관계 소식통은 “중국은 대만 문제에 관해 한국 측이 명확한 입장 정리를 하지 않는 한 계속 강경하게 나갈 것”이라고 했다. 싱 대사 발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 대만 문제 입장 정리를 원하는 중국이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동맹국을 규합해 반중연대를 강화하는 미국조차 중국과 소통라인을 열어두고 있다. 조만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방중해 고위급 소통에 나선다. 일본도 한·미·일 3국 협력에 적극 나서면서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직접 나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 카드를 띄웠다. 한·중관계 악화로 양국 간 고위급 교류가 단절된 가운데 미·중, 북·중, 중·일 정상회담이 먼저 개최된다면, 한국의 외교 공간은 줄어들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 완전히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이 아닌 이상 ‘말 대 말’ ‘강 대 강’ 대응보다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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