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 기사다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3. 6. 1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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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 모임인 카부기상호공제회원들의 모습. 이미영 제공
여성 대리운전 기사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폐를 건네며 “이 돈 줄 테니 자러 갑시다”라거나, 뒷좌석에서 내 어깨와 겨드랑이 쪽에 손을 대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번만 더 그러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 실제 경찰서에 가본 적은 없다.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왜 막장 직업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6411의 목소리] 이미영 |대리운전 노동자·카부기상호공제회 공동대표

익숙한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오전 11시. 자리에서 일어나 씻자마자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는다. 내가 일하는 트리콜 대리운전은 정장 입고 사진을 찍어 올려야 대리콜 프로그램에 로그인된다. 로그인해두고 식사와 청소 등을 마치고 오후 1~2시쯤 집을 나선다. 경남 김해 집에서 20~30분 거리에 골프장이 세개 있는데, 낮콜 대기를 위해 골프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1994년 홀로서기를 시작한 뒤 횟집, 학원, 식품재료 배달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빚도 갚고 아들 뒷바라지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생활정보지를 뒤지며 일할 곳을 찾던 중 대리운전을 알게 됐다. ‘막장 일’이라며 말리는 이도 있었지만, 운전 실력 자신 있겠다 못할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렇게 내 나이 마흔일곱 2011년 8월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한달 만에 몸무게가 5㎏ 줄었다. 처음 타보는 차, 특히 외제차 운전은 조심스러웠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지리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초행길인데 비는 오고 내비는 잘 안 터졌다. 할 수 없이 택시를 세워 따라갈 테니 목적지까지 가달라고 했다. 도착하니 택시비 8000원. 만원짜리 콜에 택시비까지 줘야 하는데 손님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객님 안 일어나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려 하니 그제야 일어났다. 돈이 없단다. 20분쯤 뒤 집에서 요금을 가져다줬다.

여성 대리운전 기사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폐를 건네며 “이 돈 줄 테니 자러 갑시다”라거나, 뒷좌석에서 내 어깨와 겨드랑이 쪽에 손을 대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번만 더 그러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 실제 경찰서에 가본 적은 없다.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왜 막장 직업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동료기사들에게 털어놨더니 “그 자리에서 경찰 불렀어야지…. 두둑이 받아야지”란 반응들이었다. 그 무서웠던 상황을 위로해준 동료는 없었다. 무섭고 치욕스러웠던 그 순간이 그들에겐 술안주 삼는 가십거리였다. 누군가 호루라기와 작은 플래시를 갖고 다니라고 말해줬다. 그때부터 내 열쇠고리에는 호루라기와 작은 플래시가 늘 달려 있다. 물론 나쁜 손님들만 만났던 건 아니다. 수고한다며 택시비 하라고 더 챙겨주던 분들도 있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며 지인들과 소원해졌고 점차 세상과 단절돼 갔다. 손님들의 갑질과 만행까지 겹쳐 위염, 족저근막염, 불면증이 생겼다. 심신이 지쳐서 2017년 대리운전을 그만뒀다. 빚 갚고, 부모님을 모셔야 했기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지인 회사 경리, 학원 차 운행, 요양병원 식당 일 등 투잡, 쓰리잡을 뛰었다. 하루 12시간을 넘게 일하며 빚도 꽤 갚았다.

2021년 10월 다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어 여성기사 희롱, 갑질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선납 주급이 인상돼 있었다. 콜당 수수료는 요금의 20%인데, 주급 수수료 20만3500원을 회사에 선납해야 한다. 이 돈을 미리 넣어야 배차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매달 보험료가 12만원이고, 김해에서 부산까지 자정~새벽 4시 기사들을 태우고 두번 왕복하는 합류차 사용료 3000원, 회사 프로그램 사용료 1000원도 매일 낸다.

현재 대리운전비는 기본거리 1만4천원~1만6천원, 김해에서 부산까지는 2만5천원부터 시작된다. 콜을 잘 받으면 하루에 5콜~6콜, 못 탈 때는 2콜도 받는다. 월·화는 콜이 없는 편이고 수·목이 많다.(요즘은 불금이 아니라 불목이다) 경제가 어렵다더니 지난해 연말께부터 확실히 콜이 줄었다. 그렇게 쉬는 날 없이 밤새워 일해서 버는 돈은 한달에 350만~400만원 정도다. 지난해 1월부터 콜당 고용보험료를 낸다. 특고(특수형태근로종사자) 프리랜서로 5월엔 종합소득세 신고도 했다.

최근엔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들 모임인 카부기상호공제회에 가입한 게 큰 변화다. 부울경 대리기사 약 2만명 가운데 카부기 밴드 회원이 6천명, 그중에 카부기공제회원이 370명이다. 다달이 회비 1만3천원을 내고, 회원들이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면 서로 돕는다. 지난해 3월 가입해 운영위원을 하다가 올해 초엔 공동대표까지 하게 됐다. 특히 여성회원 24명은 지난해 11월부터 ‘여자만세’ 카톡방을 만들어 소통한다. 대리경력 3개월에서 23년차까지 모여 둘도 없는 동료 언니, 동생 하고 지낸다. 서로 격려하고 상담도 해주고, 외곽지 픽업에 화장실 정보까지 나눈다. 언제나 외롭게 일하다 서로 염려해주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게 돼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하다. 당당한 10년차 여성 대리기사로 말이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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