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서울 지하철역 명칭과 ‘언어유산’ 문제

한겨레 2023. 6. 14. 1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신한카드’를 병기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서울시 제공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런던, 파리, 뉴욕, 도쿄, 모스크바 등 20세기 전반에 개통한 세계 주요 도시 지하철노선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여러 도시에서 진행하는 지하철 공사의 추세를 보면 노선들이 점점 복잡해지고 더 길어지고 있다.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은 앞다퉈 세계에서 가장 긴 지하철 노선을 자랑하고 있고, 인도 델리와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은 새로운 노선을 줄줄이 개통하고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수도권 전철노선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노선도가 갈수록 복잡해진다. 새로 생긴 노선 추가를 위해 역 이름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진다. 멀리서는 읽기 어려울 정도다. 늘어나는 노선 때문만은 아니다. 역 이름마다 괄호가 붙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이촌역은 괄호 안에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다.

다른 도시의 자국어 노선도에서 괄호 안에 다른 명칭을 병기하는 사례는 거의 보지 못했다. 굳이 찾자면 뉴욕의 사례가 있기는 하다. 이곳에서는 숫자로 표시하는 맨해튼 도로명을 역 이름으로 쓰고, 짧은 대시 뒤에 근처 명소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공연예술센터인 링컨센터에 가까운 역 이름은 ‘66 St–Lincoln Center’이다. 하지만 대부분 도시에서는 도로, 지명, 명소 등 간단한 명칭을 역 이름으로 사용한다.

서울의 역 이름은 노선도뿐만 아니라 역 출구에도 다른 명칭을 괄호 안에 표시하곤 한다. 어떤 곳은 노선도에 표시되지 않은 명칭이 괄호 안에 붙어 있기도 하다. 4호선 혜화역 한 출구에는 ‘혜화’ 뒤에 ‘서울대학교병원’이 붙어 있지만 노선도에는 ‘혜화’만 나오는 식이다. 공공장소나 공립기관이 아닌 기업명이 괄호 안에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에 ‘홍대입구’ 역 뒤에 ‘에듀윌학원’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유는 뭘까? 비교적 최근 개통한 역 이름에 괄호로 다른 명칭을 추가로 표시하는 건 애초 역 이름을 결정할 때 하나로 합의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예전부터 있던 역 이름에 새로운 명칭을 자꾸 추가하는 건 왜일까. 승객의 편의를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려는 배려일 수 있다. 또는 역에 가까운 기관과 상업시설 등에서 홍보를 위해 일정한 기부금을 제공한 결과일 수도 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연합뉴스

그런데 이런 서울의 역 이름 표시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한국어와 함께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역 이름을 병기한다는 점이다. 1990년대 ‘세계화’, ‘글로벌화’ 산물이자 외국인 승객을 위한 배려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영어 표시는 괄호 안 명칭까지 포함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괄호 안 명칭은 생략한다. 차이는 또 있다. 중국어는 한자로 표시하고, 일본어는 한국어 발음대로 가타카나로 표시한다. 역 이름이 길어지면 가타카나 글자 수도 길어져서 간판은 더 복잡해진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DDP)’역의 가타카나는 17글자로, 보기에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정작 일본인들에게도 한자 표시보다 더 읽기 어려울 듯하다.

시각적으로 복잡한 것도 문제지만, 서울의 역사적 특징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은 더욱 아쉽다. 조선시대 한양에 뿌리를 둔 서울의 많은 지명은 그 자체로 언어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자어가 많으니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르면 중국어와 일본어로도 쉽게 표시할 수 있다. 서울의 고유지명을 역 이름으로 쓴 곳이라면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어로만 표시해도 무방하다. 물론 20세기 후반 간소화한 중국과 일본의 한자는 정체자와 모양이 다르긴 하겠지만, 대부분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알아서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여러 언어를 병기할 필요가 없다. 노선도 등은 한결 간결해지고 이용자들이 자연스레 서울의 언어유산을 느끼고 존중하게 된다. 이밖에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명칭 중에는 역사성과 거리가 먼 것들이 많아 대체로 삭제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렇게만 해도 노선도와 간판들은 한결 산뜻해지고, 역사성 있는 명칭들이 유일한 이름이 되어 서울의 언어유산에 대한 존중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애초 지어진 서울 지하철역 이름에는 해당 지명이나 명소의 고유한 역사성이 잘 반영돼 있었다. 지나친 배려 또는 상업적 이유로 어쩌면 더 중요한 가치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울 지하철 7호선 청담역. 연합뉴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