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2023. 6. 1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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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배 LG전자 CX센터장 부사장

5월 미국에서 30년 경력 베테랑 변호사가 큰 망신을 당하는일이 있었다. 그는 약 4년 전 여객기 안에서 서빙 카트에 부딪혀 다친 승객의 법정대리인이었다. 그는 승객을 대변해 항공사를 고소했고, 항공사는 공소시효가 지난 소송이라며 법원에 기각을 요청했다. 그는 유사 판례를 담은 의견서를 제출하며 소송 진행을 주장했으나 의견서에 담긴 판례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그가 손쉬운 작업을 위해 챗GPT가 제공한 거짓 판례를 검증없이 활용한 것이다.

그가 만난 챗GPT는 거짓 정보로 구성된 시스템이었을까.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 정보로 상대방을 당황시킬 줄 아는 영악함을 갖춘 고도의 기술이었을까.

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한 두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챗GPT의 자연스러운 대화와 놀라운 지식 수준에 열광했다. 어떤 교수는 “챗GPT 같은 모델이 많이 보급될 경우 그동안 창조적 영역이라 여겨진 화가, 작가 등 직업도 살아남기 힘들어진다”며 인간 능력의 한계을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은 인간이 보통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매우 빠르고 방대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생성형 AI가 인간의 탁월함이 필요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생성형 AI는 인간이 해낸 일의 ‘결과’를 모방해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감성, 인성, 관계를 활용하는 과정까지 모방하는 일은 아직까지 요원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AI 비서, 즉 ‘개인 디지털 에이전트’를 만드는 회사가 미래 최고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탁월한 비서는 상대방의 객관적인 조건뿐 아니라 감성, 인성, 관계까지 고려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인간이 기술보다 우위에 서는 법

LG전자 CX센터 ‘LSR(Life Soft Research)고객연구소’는 다학제적 관점에서 고객을 연구한다. 특히 구석기 시대에서 고대, 중세,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를 다루는 역사학, 인류학적 역량을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기술이 발달해도 인류 역사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식사, 유희, 사냥, 휴식 같은 활동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와 기술이 진화했을지라도 방법에만 차이가 있을 뿐 인류의 본질적 활동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먼저, 식사부터 살펴보면 음식을 신선하게 먹고 싶던 옛날 사람들은 동빙고, 서빙고 등을 만들었다. 이후 냉장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냉장고를 구매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냉장고에 식재료를 저장하는 대신 마켓컬리, 쿠팡 등 딜리버리서비스를 이용한다.

유희 활동도 살펴보자. 옛날엔 그저 모닥불을 피워놓고 놀았다면 고대에는 콜로세움등 에서 검사들의 싸움을 관람하고 즐겼다. 그런데 근대에 영화라는 콘텐츠가 생기면서 다들 극장으로 몰려가 영화를 봤다. 이후 TV가 생겼는데 초기에는 온 가족이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봐야했다. 채널 선택권도 대개 아버지에게 있었으나 요즘은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각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본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봉수대에 연기를 피워 적이 침입했다는 신호를 보내거나 직접 달려가 정보를 전했다. 이후 전보, 편지, 전화를 거쳐 휴대폰이 생기며 이동없이 소통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의 스마트폰에는 통화 아이콘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는 음성 기반의 소통보다 메시지나 카카오톡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식사, 놀이, 소통에 대한 니즈는 예부터 존재했다. 기술 발전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요즘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다. 아기도 스마트 기기를 터치하고 음성 AI에 옹알이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들의 자녀세대들이 태어나면 또 어떤 기술을 활용하고 있을까. 언젠가는 ‘옷을 빨 때 세탁기 버튼을 눌러서 작동시켰다고? 말도 안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처럼 고객 경험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 가치와 욕망은 변하지 않고 전달 매체와 방법만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할 뿐이다. 즉, 기술은 우리의 근원 니즈를 서포트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무엇이 절대 변하지 않는 가치인지 제대로 추적해, 변화된 수단으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제공하는 곳에 기회가 있다. 기술이라는 수단의 변화만이 좋은 줄 알고 정신없이 좇다보면 자칫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챗GPT가 출현하며 완전히 역사가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구글 트랜스포머, 버트(Bert)와 같은 생성형 AI 모델만 있었다. 여기에 오픈 AI가 만든 챗GPT가 윤리적 필터를 추가하고, 수학 전문 프로그램과 제휴까지 맺으면서 AI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챗GPT는 질문을 잘 하면 좋은 답을 내놓는 지능을 갖추게 됐다. 그래서인지 AI 이미지 생성기인 ‘스테이블디퓨전’를 통해 거래되는 상품은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다. 사람 이미지에서 코, 눈 크기를 조정하는 과정에 필요한 변수, 코드 등이 거래 대상이다. 지금까지 학교 시험에서는 문제를 풀어 답을 구해야 했는 데 앞으로의 시험에서는 답을 먼저 보고 이 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결과물 자체보다 그 결과물에 필요한 본질과 가치에 집중하고 생각하는 법까지 AI가 따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챗GPT가 마구 쏟아내는 결과물 앞에서 인류가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더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본 윌슨은 “인류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구석기 시대의 감정과 중세의 제도, 그리고 신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 수준에 가깝게 발달해 가는 첨단 기술의 시대에도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과 감정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각인된 경험에 본능적으로 끌리게 돼 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고찰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LG전자는 고객 경험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고객을 관찰하고, 고객 상황에 들어가 직접 체험하며 고객과 어울리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등 입체적인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 방법론 또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객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목적에는 변함이 없으나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직접 관찰이 영상 관찰로, 직접 체험이 데이터 분석으로 변화 중이다.

고객 관련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인간이 글쓰기를 연마하는 본질은 결과물 자체의 의미보다 사고 훈련에 있다. 챗GPT가 유려한 글을 완성해주는 시대에도 질문하는 존재는 인간이며, 가장 적합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주체도 인간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는 팬데믹 시기의 행복에 대해 연구했는 데, 사람들은 코로나19 대란 속에서도 친한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1997년 한 체스 경기에서 컴퓨터 알고리즘이 인간의 왕좌를 빼앗았지만, 넷플릭스 시리즈 ‘퀸즈 갬빗’의 인기에 힘입어 체스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늘었다. 결국 인간은 기술의 발달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 디자인, 서비스를 기획하고 출시하는 일이 곧 ‘고객경험(CX)’이라는 단어로 함축되는 시대에 필자의 생각은 진짜 인간적인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진다. AI를 통해 생생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일은 고객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이해해 최적 솔루션을 제공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동안 “고객님, 우리 기술과 상품은 정말 좋아요, 사주세요”라고 설득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 “우리 기술과 상품으로 고객님이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영위하길 바래요”라는 진심을 전달하는 일에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객이 기술을 통해 더 인간적인 경험을 향유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때 진정성 있는 고객 가치 창출이 가능할 것이고, 그로 인한 사업적 성과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철배 LG전자 CX센터장 부사장 cxcenter@lge.com

〈필자〉이철배 LG전자 부사장은 전사 관점의 고객경험(CX) 혁신과 상품·서비스·사업모델 기획 등을 통한 CX혁신 가속화를 추진하는 CX(Customer eXperience)센터를 맡고 있다. 1993년 LG전자(옛 금성사) 입사 이래 CX 기반 디자인 정체성 확보, 경쟁력 강화 및 다양한 비즈니스 혁신 기회를 발굴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LG전자 이노베이션사업센터장, 뉴비즈니스센터장, 디자인경영센터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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