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타고난 여행자, 천경자

관리자 2023. 6. 1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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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늦게 지는 덕분에 갑작스레 여유를 선물 받은 듯하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외투를 입고 양말을 신는 거창한 준비 없이 바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1954년부터 20년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일하던 천경자는 1974년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로서 스케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야생의 자연 속에서 자유를 발견한 이 여자는 바로 천경자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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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초원Ⅱ’, 1978년, 서울미술관 소장. 소마미술관 ‘다시 보다, 한국근현대미술’전

해가 늦게 지는 덕분에 갑작스레 여유를 선물 받은 듯하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외투를 입고 양말을 신는 거창한 준비 없이 바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벼운 한겹의 옷에 발가락이 나오는 샌들 말이다. 그리고 오후 8시가 돼도 하루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듯한, 긴 저녁의 느슨한 시간이 좋다.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느슨해지니, 더 적극적으로 자유롭고 싶다는 열망도 커진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자유는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문제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여행은 상상하기엔 낭만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미리 여행비를 마련하느라 돈을 모아야 하고, 여정을 계획하고 차편과 숙박을 예약하는 등 준비해야 할 자잘한 일들이 넘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어도 낯선 곳에서는 예상 밖의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홀로 하는 여행이 작품 창작의 직접적인 동력이 됐던 화가는 천경자(1924∼2015년)다. 그의 1978년 그림, ‘초원 Ⅱ’에는 아프리카 초원 위로 사자와 코끼리, 그리고 얼룩말이 보인다. 1954년부터 20년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일하던 천경자는 1974년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로서 스케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여행지의 세세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여권을 가진 이도 별로 없고,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먼 세계 여행은 지극히 드물던 때에 천경자는 남미와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섬들까지 날아가 이국의 꽃과 여인들을 그렸다.

천경자는 그림도 화려할뿐더러 외모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패션으로 눈에 띄었다. 하지만 평소 집에 있을 때는 24시간을 단위로 단순한 일과를 반복했다. 천경자의 큰며느리인 유인숙이 쓴 ‘미완의 환상여행’에 시어머니 천경자의 일상이 며느리가 관찰한 대로 묘사돼 있다. 천경자는 독서가 취미였다. 특히 불멸의 열정과 자존심 강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폭풍의 언덕’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실제로 소설가의 생가와 소설 배경이 된 장소까지 직접 찾아가볼 정도로 좋아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꼭 챙겨봤으며, 운동이나 걷기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방에서 온종일 그림을 그리며 커피와 담배, 그리고 반려견을 친구로 삼았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거실에서 혼자 캔맥주 한잔을 했다.

여행 중의 화가는 달랐다. 일정을 미리 짜두기보다는 호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타고난 여행자였다. ‘초원 Ⅱ’ 속의 여자는 거대하고 둥근 코끼리 등에 나체로 엎드려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낄 것 없이 문명의 장식을 벗어던졌다. 야생의 자연 속에서 자유를 발견한 이 여자는 바로 천경자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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