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트라우마와 도덕적 손상
“선생님, 저는 중학교 때부터 기자가 꿈이었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작년에 드디어 신문사에 입사했어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토요일에 데이트를 하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았어요. 노트북을 챙겨서 곧장 현장으로 갔고, 시신들이 들려 나오는 걸 보고 멍해졌어요. 대학병원으로 이동해서 밤새 응급실 앞에 있었는데 불안에 휩싸인 실종자 가족들이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기자인 저라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구요. 제가 아는 정보는 다 대답해 드렸어요. 정말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어요. 그러다가, 조금 전까지 가족을 찾아 헤매던 실종자 가족이 유가족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입이 됐어요. 취재해야 하는데 그분들의 고통을 느끼니 말을 걸지 못하겠더라구요. 망연자실한 유가족을 취재하려고 몰려드는 기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많이 괴로웠어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다음 날 저는 전에 작성한 기사로 큰 상을 받았어요. 평소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을 텐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3일째 되는 날 이태원 분향소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멈추지를 않았어요. 선배들이 저더러 이태원 취재 그만하고 봉화 탄광 매몰 사고 생환자 취재를 다녀오라고 했어요. 구조되어 나온 사람들을 취재하니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나는 괜찮은데 선배들이 자꾸 상담을 다녀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훤칠한 키의 건장한 젊은 기자가 꺼내놓은 이야기에는 처참한 재난이 가져온 트라우마와 더불어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에 의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도덕적 손상은 개인의 깊은 도덕적 신념이나 가치에 위배되는 행동이나 경험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정서적 고통을 일컫는 말이다. 전투, 동료나 민간인의 사망과 같은 상황에 노출된 군인이 주로 경험한다고 알려져 있다.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 의료인,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응급구조대원도 도덕적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죄책감, 수치심, 분노, 우울, 불안, 환멸감에 시달리고, 직업 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는 등 도덕적 손상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초래한다.
기자는 자신의 윤리적 기준이나 직업 정신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때 도덕적 손상을 경험할 수 있다. 정확성이나 객관성을 타협하도록 강요받거나, 도덕적으로 괴로운 사건을 목격하거나 보도할 때, 진실과 공익보다 상업적 이익이나 정치적 의도를 우선시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발생할 수 있다.
기자들 모두가 손꼽는 가장 힘든 취재가 바로 유족 취재다. 응급실과 장례식장에서 애통해하는 유족에게 다가가 취재할 정보를 캐낼 때, 유족에게 욕설을 듣는 것은 물론이요 기자 자신 또한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라며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물론 취재 관행상 재난 발생 시 다수의 기자가 유족들에게 몰려가서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기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기자가 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던 이 젊은이의 도덕적 손상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억압하고 부정하는 것이 기자다운 태도라고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갖고 있다. 그 감정은 억압과 부정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곪아 마음을 병들게 하여, 우울과 불안,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인정하고 꺼내놓는 것이 성숙한 전문가다운 태도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라우마와 그 영향에 대해서 이해하고,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세월호 사고를 겪으며 트라우마와 도덕적 손상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뉴스룸의 선배들이 이 젊은 기자를 탄광 사고 생환자에게 보내 자신의 직무가 가진 긍정적인 의미를 되찾게 한 것은 바로 이런 경험을 통해 후배가 회복할 가장 좋은 방법을 함께 모색한 결과다.
한국기자협회, 한국여성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가 힘을 모아 방송기자인 이정애 위원장을 주축으로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를 구성하여 오랜 작업 끝에 5월19일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 1.0’을 발표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박재영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교수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 취재 사례 중 유가족 곁에서 오랜 시간 조용히 머물며 공감하고 함께 애도하여 자연스럽게 유가족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낸 훌륭한 기자에 대해 언급하며, 기자의 근본 자세인 관찰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냉정한 관찰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따뜻한 관찰이다. 언론은 트라우마를 악화시킬 수도, 치유할 수도 있다. 트라우마를 이해한 언론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들뿐만 아니라 언론인, 정보제공자, 취재원, 언론이용자 모두를 이롭게 한다. 비난과 혐오는 트라우마를 악화시키고 공감과 이해는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위의 사례는 본인의 동의를 받고 공개하는 것입니다. 언론의 트라우마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도록 허락해주신 기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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