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사라지는 원조 외과 백병원
의료계에서는 맹장염을 흔히 ‘아뻬’라고 부른다. 맹장염 즉 충수돌기염의 영어 의학용어 ‘아펜디사이티스’에서 앞글자를 따왔다. 제왕절개도 ‘시저리언 섹션’을 줄여서 ‘시섹’이라고 말한다. 외과로 출발한 백병원과 산부인과로 시작한 을지병원이 예전에 서울 시내에 있었는데, 백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는 “아뻬! 아뻬!”하면서 가고, 을지병원 쪽은 “시섹! 시섹!” 하며 간다는 말이 있었다. 두 병원이 이 수술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 박사는 외과의사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의대 전신 경성의전을 졸업했다. 3·1운동에 참여해 10개월 옥살이도 했다. 도쿄대에서 박사를 따온 후, 경성의전 외과학 주임교수가 됐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를 여는 개복수술을 했다. 일제 말에 지금의 명동성당 옆 백병원 자리에 문을 연 백인제 외과에는 전국 팔도에서 맹장염 환자가 몰려와, 일주일에 떼낸 맹장이 한 가마니를 넘었다고 한다.
▶1980년대 백병원은 한국 성형수술의 메카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세민 교수가 마법 같은 수술을 하면서, 안면 기형 등 성형외과 입원 환자가 100명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백 교수는 백인제 박사와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 하루에 안면 윤곽 수술 등 얼굴뼈 바로잡는 수술이 20여 건이 이뤄졌다. 수지 접합, 현미경 수술 등 최초·최고가 따라붙었다. 성형외과 교수가 20~30명에 달했고, 이들 백세민 사단은 전국으로 흩어져 뼈를 다루는 성형외과를 이끌었다.
▶백병원, 차병원, 길병원 등은 의원에서 시작해 의과대학병원이 됐다. 그래서 의료계에서는 병원 이름을 한 글자로 지어야 의과대학이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림대, 순천향대, 건국대, 건양대 등도 병의원에서 시작해 대학이 됐다. 그 원조 격인 서울 백병원이 개원 82년 만에 사라질 위기다. 누적 적자 1745억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다. 도심 인구 공동화로 환자가 줄어든 데다, 경영 부실이 겹쳤다고 한다.
▶백병원의 모(母)대학 인제대는 설립자 백인제 이름에서 따왔다. 창립 이념은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술제세(仁術濟世)다. 1990년대 서울 백병원은 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 외과 트로이카 병원으로 명성을 날리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백인제 박사는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리는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를 제자로 키웠다. 그 손자는 지금 백병원 외과 교수다. 원조 외과 병원이 사라지는 사실이 요즘 외과의사 부족 현상과 겹쳐 아쉬움을 남긴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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