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은 왜 에드워드 호퍼를 사랑할까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6. 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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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전시·책 열풍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15만 돌파
4월 책 판매도 2배 이상 늘어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헌정하고
스티븐 킹 등이 쓴 소설도 나온
예술가가 사랑한 ‘미국 국민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동물원에 가기’에 이렇게 썼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쓸쓸한 그림에 매료된 관람객들이 미술계와 함께 출판계에도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4월 개막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의 인기는 광풍에 가깝다. 미술관에 따르면 8일까지 누적 관람객 15만명을 돌파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신작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예스24에서는 호퍼 관련 도서가 전시 개막 직후인 4월에만 3월 대비 판매량이 241.4% 증가했다.

국내에 출간된 7종의 호퍼 관련 도서 중 가장 많이 팔린 건 전시에 발맞춰 지난달 출간된 얼프 퀴스터의 ‘호퍼 A-Z’로 호퍼의 생애를 알파벳 키워드로 정리한 책으로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6월에는 국내 작가가 쓴 신작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도 출간됐다. 미술사가 이연식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조명하고 분석한 책이다. 극장, 정거장, 에로티즘 등 15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호퍼의 삶을 돌아본다.

에드워드 호퍼
호퍼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만날 수 있는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2012년 출간된 게일 레빈의 평전 ‘에드워드 호퍼’지만 아쉽게 현재 절판됐다. 휘트니미술관에서 호퍼의 첫 큐레이터로 일했던 레빈은 호퍼를 ‘빛의 화가’로 묘사했다. “호퍼는 빛으로 그림을 완성하며, 빛이 그림 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 준다”라고 썼다.
호퍼의 ‘공간’에 매료된 미국 계관 시인 마크 스트랜드
빈방의 빛
재미있는 것은 호퍼가 유난히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가라는 점이다. 이유는 뭘까. 1990년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추대된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한길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말년에 시 쓰기를 그만두고 미술작가로 활동하며 전시도 열었던 이 시인은 비평가들의 낡은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에서 비롯된 만족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관객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라고 반문하면서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호퍼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의 탁월함을 상찬한다.

‘오전 7시’ [서울시립미술관]
‘햇빛 속의 여인’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전시에 공수된 ‘오전 7시’에 대해 시인은 작가의 공간 연출에서 숨겨진 의미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복원해낸다. “이 그림에서 숲은 상점 대신 갈 수 있는, 으스스한 대안이다. 상점은 숲과는 달리 일련의 질서를 보여준다.” ‘햇볕 속의 여자’를 두고는 “묘사된 여자는 그 누구의 미적 관념에도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방 안을 다소 울적하고 사색적인 에로스로 가득 채운다”라면서 “전날 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뒷모습처럼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 해석한다. 시인이 매료된 건 호퍼가 숨겨 놓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푸른 저녁’ 소재로 쓴 미스터리 소설도 탄생해
빛 혹은 그림자
단편소설집인 ‘빛 혹은 그림자’(문학동네)가 출간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2017년 출간된 이 책은 스티븐 킹, 조이스 캐럴 오츠, 마이클 코널리 등 17명의 작가가 에드워드 호프의 그림 17점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스릴러, 드라마, 범죄소설 등을 모아 엮었다. 20세기 초 자동판매기로 음식을 판매하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책의 기획자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1932년 작 ‘뉴욕의 방’을 선택해 대공황 시기를 사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 등이 실렸다.
‘푸른 저녁’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중인 삐에로와 짙은 화장의 여자가 담긴 ‘푸른 저녁’을 모티브로 쓴 소설도 있다. 로버트 올렌 버틀러는 광대와 여자, 그리고 화자(화가 본인)와 옆자리에 앉은 남자(르클레르 대령)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로런스 블록은 서문에서 호퍼의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서 “다만, 그 그림들 속에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음을 ‘강렬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암시할 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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