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우산 같은 질긴 사랑을 버린다

한겨레 2023. 6. 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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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픽사베이

비 오는 날의 가단조

사랑이 시드는 것은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책장에 갇혀 있는 책들이 너무 불쌍하여 책들을 구해 주기로 하였다. 빼곡히 서 있는 책들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마저도 누워 있는 책들에 가려져 책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누워있는 책도 어디가 아픈 건지 마치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환자 같았다. 이 모든 게 책을 방치한 내 탓이었다. 그래 놓고는 이제 와 책을 구해 줘야겠다고 하니 그 뻔뻔함이 가소롭기 짝이 없다. 책을 책장에 가두어 놓는 건 책을 학대하는 행위라고 변명해 보지만 책을 외면한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동안 저 책들이 나를 지켜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니 책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다. 책장의 책들을 모두 꺼내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포개 놓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책을 죄인 취급하며 끈으로 묶고 있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책장의 책들이 시들지 않는 종이꽃처럼 보이는가 하면 사용하지 않는 장식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꽃병에서 시드는 꽃처럼 책장에서도 책이 시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병에 물을 갈아 주듯 책장의 먼지도 닦고 흐트러진 책도 다시 정돈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차라리 책장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재활용하는 날, 몇 덩어리 되는 책을 손수레에 싣고 신문 버리는 곳 옆에 버렸다. 내가 책을 버렸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버린 책들을 누군가가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예기치 않은 비가 내렸다. 비에 젖은 책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재활용장에 나가 보았다. 책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누군가 읽고 싶은 책들을 가져갔다면 다행이지만 나머지 책들은 폐지로 분류될 게 뻔했다. 비에 젖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아주 못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2]

날마다 뜨고 지는 해처럼 꿈도 날마다 뜨고 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싱싱한 해를 보듯 싱싱한 꿈을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꽃잎을 닫는 꽃이 있는가 하면 아예 수많은 꽃송이가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꽃도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꿈이 시들면 다시 못 피는 줄 알고 사랑이 시들면 다시 못 피는 줄 안다. 날마다 꿈을 버리면 날마다 꿈을 볼 수 있고 날마다 사랑을 버리면 날마다 사랑을 볼 수 있다. 꿈이 시들고 사랑이 시드는 것은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사랑이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자칫 종이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변하지 않는 사랑보다 변하는 사랑이 나을지도 모른다.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는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하늘을 보라.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구름이 많은 날도 있고 구름이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하늘을 믿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바라보는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내 마음이 변하면 사랑이 아니고 내가 바라보는 그것이 변했다 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사랑이다. 집착은 매달리는 것이다. 사랑에 매달리면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하려면 날마다 사랑을 버려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픽사베이

[3]

서울에서 술벗과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우산을 갖고 가라고 한다.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창고에서 오래된 낡은 우산을 집어 들었다. 추억이 되지 못한 추억들이 추억창고 옆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시리곤 했는데 이 우산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전 일이다. 제대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만난 여자 동무가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내 동무가 소개해 주었는데 뜻하지 않은 만남에 나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봄, 그녀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다가 그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 악보와 함께 집 마당에 있는 모란꽃을 조그만 액자에 넣어서 주기로 하였다. 그보다 좋은 다른 선물을 해 주고 싶었으나 나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드디어 그녀의 생일날! 나는 잠실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무섭게 생긴 그녀의 어머니였다. 머뭇거리는데 마침 그녀가 어머니 뒤에서 나타났다.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에게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에게 어느 대학 다니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머니 팔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는 왜 저런 아이하고 노느냐는 말이 방 안에서 새어 나왔다. 방 안에서 나온 그녀가 살짝 웃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더니 조심스레 선물 포장지를 벗겼다. 액자를 보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힐끗 액자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분명히 예쁜 모란꽃 액자였는데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는 것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창피해서 얼른 곰팡이 액자를 들고, 미안하다. 내가 선물을 잘못 가져왔다.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뒤쫓아와 우산을 건넸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비를 맞고 걸었다. 우산을 펴고 싶었지만 그러면 우산 속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방 안에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왜 저런 아이하고 노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비처럼 눈물이 흘렀다. 곰팡이는 왜 하필 그때 등장해서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가? 쓰레기통에 액자와 악보를 버리고 빗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내 모습을 쳐다보았다. 우산을 들고 빗속을 걷는 내 모습이 이상했나 보다. 나는 집에 올 때까지 우산을 펴지 않았다.

[4]

독립문역 부근에서 동무와 한잔하고 헤어졌다. 정발산역에 내려서 출구를 나오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식당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내려가 전철을 타고 40분이나 걸리는 독립문역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서 우산을 찾으니 종업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우산을 갖다 주었다. 그때 그 우산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하마터면 눈물이 다 날 뻔했다. 우산을 들고나오면서 나는 전철역까지 비를 맞고 걸었다. 그냥 잃어버려도 되는 낡은 우산이었다. 하지만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자그마치 20년이 지나도록 버리지 않은 우산이었다. 비록 추억창고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곰팡이 모란꽃이 떠오르니 이걸 어쩌란 말이냐.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동무! 지금쯤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5]

비를 쫄딱 맞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투덜댄다. 내가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그러는 것이다. 아내는 모른다. 내가 일부러 비를 맞고 왔다는 것을. 이제는 버리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잃어버리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른 거니까. 재활용하는 날 마지막으로 우산을 펴 보았다. 우산 속에서 오래된 그녀의 웃음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앞으로는 그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우산을 접으니 웃음소리가 멈췄다. 마침내 나는 그 추억의 낡은 우산을 버렸다. 추억창고에 저 우산을 넣어두려면 추억이 되지 못한 저 우산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픽사베이

[6]

비에는 슬픈 비, 즐거운 비가 있다. 나는 슬픈 비를 많이 맞고 자랐다. 나중에는 슬픈 비라고 생각했던 비가 즐거운 비가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기준을 정했다. 비와 하나가 되면 즐거운 비, 그렇지 않으면 슬픈 비라고. 외로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외로움이 시작될 땐 슬프지만 외로움과 한 몸이 되면 즐거운 거라고. 추운 겨울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춥고 더운 여름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덥다. 비에 젖은 개 한 마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간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개라고 생각했다. 비는 누구한테나 공평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즐거운 장조(長調) 비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슬픈 단조(短調) 비가 된다. 지난날 나에게 그녀는 읽고 싶은 책이었고 그녀에게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책이었다.

‘흘러가는 빗물 위에

사랑 하나 흘러간다

내 사랑이 나를 두고 흘러서 간다

햇빛 찾아 햇빛 찾아 흘러간다

가자 가자 이젠 가자

잊자 잊자 아주 잊자

햇빛이여 햇빛이여 비추어 다오

비에 젖은 내 사랑이 춥지 않게’

-<비 오는 날의 가단조>, 1980/1987

글 한돌(음악가,작사·작곡가, 가수)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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