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소음·욕설에 몸살 앓는 기업들… 인근 주민도 고통

정재훤 기자 2023. 6.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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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기준 강화해야” 목소리

지난 12일 정오.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정문 앞에서 민중가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이들은 도로 한쪽을 점거한 채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옆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가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곳 인근에서 만난 한 현대차 직원은 “출퇴근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만, 남에게 피해를 지속적으로 주면서 시위를 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서울시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인근 염곡사거리에 자극적인 표현이 적힌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있다./정재훤 기자

◇ 불법·편법 대기업 사옥 앞 시위... 직원·주민들 ‘고통’

주요 그룹사 사옥 앞에서 노조와 시민단체 등의 집회나 1인 시위가 잇따르면서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집회 주최 측은 주변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과도하게 소음을 발생시키고 인도와 차도를 점거해 이동에 불편을 초래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기업 사옥에 입주해 있는 어린이집은 집회 및 시위 소음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한 대기업 직원은 “지난 10년 동안 출근하면서 거의 매일 소음에 시달렸다. 밤에는 환청이 들릴 정도”라며 “일부 여직원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시위대가 무서워 피해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따르면 10분간 측정한 평균 소음이 65데시벨(주거지역 기준)을 넘거나, 최고소음 기준인 85데시벨을 1시간 동안 세 차례 이상 넘기면 규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시위 참가자들은 5분간 큰 소음을 낸 후 나머지 5분 동안 소리를 줄여 평균값을 낮추거나, 1시간에 두 번만 기준을 초과하는 소음을 내는 등의 꼼수로 제재를 피하고 있다. 사실상 집시법 규정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집시법에 소음의 지속 시간, 반복적 재생 등에 대한 세부 규제가 없어 불법 시위에 대한 제지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지난 12일 서울시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근처에 설치된 천막이 보행자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정재훤 기자

이날 현대차 정문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염곡사거리 인근에는 불법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들 현수막에는 원색적인 표현들이 가득 쓰여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인근 인도에는 절반 이상의 공간을 차지한 거대한 천막이 설치돼 있었다. 이 천막은 사거리 교차로 횡단보도에 진입하기 직전에 있어서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직접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이 천막은 한 자동차 판매대리점에서 일하던 A씨가 설치했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대리점 대표와의 불화로 계약이 해지됐지만 이와 무관한 기아에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10년 동안 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현대차그룹과의 민형사상 소송에서 대부분 패소했지만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12일 오후 3시쯤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한 삼성전자 사옥 정문 앞에 천막과 트럭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다./정재훤 기자

◇ 총수 자택 앞에서도 시위... 美는 소음 위반 시 체포

12일 오후 2시쯤 강남역 인근에 있는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도 천막과 트럭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광화문 KT 사옥 앞에서는 ‘비리 경영진 척결! 어용노조 청산’, ‘KT부패 발본색원’ 등 명예훼손성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계동의 현대건설 앞에는 인근 재건축 단지로부터 소음진동분진피해를 받았다며 보상을 하라는 한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의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사정은 대기업 총수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삼성전자 노조는 이재용 회장 자택 앞에서 시민단체 연대 요청을 위한 집회를 열기도 했다. 또 서울 가회동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자택 앞에도 주가 하락에 불만을 품은 한화그룹 소액주주모임과 한국투자자연합회가 ‘승계 친화적 기업’이라며 시위에 나섰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KT 본사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박성우 기자

집회·시위 과정에서 제기되는 소음 관련 민원은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이 지난해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집회 소음 관련 112 신고 건수는 월평균 2398건이었지만 지난해에는 3207건으로 늘었다. 2020년 경찰청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74.6%는 ‘집회 소음이 일상생활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조계에서는 시위의 소음과 명예훼손성 현수막, 포스터 등에 대한 실효성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해외에서는 소음 규정을 한 차례만 어겨도 곧바로 규제 대상이 되거나, 형법에 시위 현장의 현실을 반영한 소음 관련 처벌 규정이 따로 명시돼 있다.

미국 뉴욕시의 경우 집회 신고를 했더라도 확성기를 사용하려면 경찰과 관할 지자체로부터 1일 단위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여러 날에 걸쳐 시위가 이뤄질 경우 집회 신고는 최초 1회만 해도 되지만, 확성기 소음허가(Sound Permit)는 매일 새로 받아야 한다. 만일 허가 받지 않은 소음 기구를 사용하는 경우 해당 기구의 압수 또는 벌금 부과 등의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

2022년 7월 4일 서울 용산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 앞. 삼성전자 노조원들이 천막시위를 하고 있다./조선DB

워싱턴D.C.는 ‘소음규제법(District of Columbia Noise Control Act)’에 따라 상업 지역 기준 주간 65데시벨(dB), 야간 60데시벨을 넘는 소음을 발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위반 행위가 계속되면 시위자가 현장에서 체포돼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지자체가 시위 현장으로부터 1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85데시벨을 초과하는 소음을 ‘폭력적 소음’을 의미하는 ‘폭(暴)소음’으로 규정해 원천 금지한다. 이를 1회만 어겨도 경찰이 즉시 규제에 나서고 위반 상태가 지속되면 강제 퇴거와 자택 구금 등 규제 강도가 높아진다.

한국은 21대 국회 들어 소음 규제를 강화하는 취지의 입법안이 모두 9건 발의됐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그간 집회 시위에 관한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 온 영국 등도 최근에는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라면서 “이들 해외 사례를 참고해 일반 시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적절한 규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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